2018. 2. 제55호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글 나누기 1

바르고 쉽게 개선하는 공공언어
'부속도서'는 어떤 책인가?

글. 이건범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 대표

  • 프린터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에 공유하기
  • 구글플러스 공유하기
  • 네이버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소리는 같고 뜻이 다른 말

우리가 자주 쓰는 '도서'라는 말은 '도서관, 아동 도서, 사회과학 도서' 등 책을 뜻한다. 그런데 가끔 일기예보 같은 데에서 '산간 도서'라는 말을 들어봤을는지 모르겠다. 우리 헌법 3조에도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하여 '도서'라는 말이 나온다. 짐작컨대 이 도서는 '섬'이리라. 영토는 땅을 뜻하고 한반도라는 육지 밖의 땅은 섬이니 말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책과 같은 뜻인 도서(圖書) 말고, 크고 작은 온갖 섬을 뜻하는 도서(島嶼)가 나온다. 둘은 소리가 같고 한글 표기도 같지만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인 것이다. 이런 사정 탓일까, 한자어에 동음이의어가 많으니 한자어는 반드시 한자로 적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의 논리적 근거는 매우 약하다.

사실, 한자어뿐만 아니라 고유어에도 동음이의어가 있다.

  고유어 동음이의어 사례
"그 녀석은 솟는 물처럼 을 내는 아이구나."
"흔들리는 안에서 차가운 를 먹었더니 갑자기 가 아파."
"힘이 달려서 더 이상은 못 달리겠어."

영어에도 박쥐를 뜻하는 'bat'는 방망이를 뜻하는 'bat'와 글자와 소리가 모두 같다. 어느 언어에나 동음이의어는 있게 마련이고, 사람들은 이를 문장 흐름 속에서 구별한다. 그런데 유독 우리 한자어에는 동음이의어가 몹시 많다. 그건 우리말의 음을 한글로 표현해서 쓰는 글자가 2,400여 자인데, 한자의 음은 겨우 480개라서 그렇다. 적은 수의 글자를 조합하다보니 동음이의어가 많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해결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자로 적을 수 있는 건 한자로 적고, 한자 공부도 많이 시키는 방법이다. 50년 전의 국한문혼용 시대로 돌아가는 길. 그런데 한자로 적으면 글자가 다르니 글에서는 구별할 수 있겠지만, 한자로 적든 한글로 적든 말로 할 때는 여전히 구별이 되지 않는다. '島嶼'로 쓰든 '도서'로 쓰든 말할 때에는 모두 [도서]로 소리 나니, 앞뒤 문맥과 흐름으로 뜻을 알아채야 하는 사정은 변함이 없다. 그와 반대로 말로 할 때 구별이 된다면 한자어라 하여 꼭 한자로 적어야만 구별할 수 있다는 주장은 궤변이리라.

그럼 어쩌란 말이냐고? 둘째 방법으로, 말을 바꾸는 길이다. 글자와 소리가 같고 뜻이 다른데 평소에 자주 헷갈리는 말이 있다면 그 중에 가장 많이 쓰는 말은 남기고 나머지는 말을 바꾸는 게 좋다. 먼저 고유어, 즉 토박이말로 같은 뜻의 말이 있다면 그렇게 바꿔야 한다. 책을 뜻하는 '도서'를 가장 많이 쓰므로 이를 남겨두고 섬을 뜻하는 '도서'를 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위 헌법도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에 딸린 섬이다."라고 '부속도서' 대신 '딸린 섬'이라 바꾸는 방법이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에 딸린 섬이다.

이는 혼동을 피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어려운 말을 쉽게 바꾸는 것이기도 하고 문장을 우리말답게 다듬는 일이기도 하다. 1타 3피다. 마땅한 토박이말이 없다면 같은 뜻으로 쓰는 다른 한자어, 쉽고 자주 쓰는 한자어로 그 쓰임새를 몰아가는 게 좋다.

어렵고 낯선 한자어, 쉬운 말로 바꾸기

굳이 동음이의어 문제가 아니더라도 어렵고 낯선 한자어를 쉬운 말로 바꾸는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보자.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인 '섬'을 제쳐두고 잘 쓰지도 않는 '도서'를 굳이 사용해야만 헌법의 권위가 살고 효력이 지켜지는 것일까? 법률에 쓰이는 말이 매우 어렵다는 사정이야 법정 드라마 정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지만, 그럴 때마다 꼭 저렇게 어려운 말을 써야 하나 하는 의문을 누를 길이 없다.

물론 국한문혼용 표기도 고쳐선 안 된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부터 법률 용어와 문장은 역사성이 있으므로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법률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재산, 안전, 복지 따위 생활의 틀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 말이 이해하기 어려우면 학력이나 얻은 지식의 양에 따라 생활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누구는 법률의 주인으로, 법률이 지켜주는 곳에서, 법률을 부려가며 살고, 누구는 법을 두려워하고, 법률에 쫓기며 법을 원망할 수도 있다. 내 경험을 한 가지 말해보겠다.

나는 국어운동을 하는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의 대표 자격으로 2012년부터 5년 동안 서울고등법원의 시민사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내가 시민사법위원을 지원하게 된 데에는 젊은 날의 감옥살이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난 대학 4학년이던 1986년에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민주 개헌을 요구하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넉 달가량, 1990년 말부터는 대학생과 노동자 들을 조직하여 민주화운동을 벌인 일로 2년 4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두 번째 감옥살이 때 나와 함께 방을 쓰던 사람들은 모두 1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항소한 절도범, 특히 '때끼'라는 은어로 부르던 소매치기들이었다.

서울고법 시민사법위원에 지원할 때 나는 그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는 청년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 투옥되어 밑바닥 피의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우리말글을 잘 지켜야 하고 되도록 쉬운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저로서도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여러 가지 재판 관련 용어 때문에 그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검찰의 공소장이나 재판부의 판결문에서 사용하는 말들은 일반인에게 참으로 생소합니다. 그들은 자기방어를 포기하고 인생을 포기할 처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제가 직접 큰 법전과 국어사전을 구해 그 말들의 의미를 찾아 뜻을 풀어주었고, 그 경험 덕에 한글운동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부작위, 일응, 일몰, 기속, 해태, 부종, 가사 등 법률 용어가 아님에도 법조계에서 사용하는 이런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일반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검찰과 판사는 그들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런 어려운 말을 통해 시민 위에 군림한다.

내가 시민사법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할 무렵에 마침 서울고등법원에서는 형사, 민사, 행정 재판의 항소 절차를 쉽게 설명해주는 안내 소책자를 발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꼬박 나흘에 걸쳐 그 원고를 다듬어 주었다. 물론 법률 용어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었지만, 정말 어려운 말은 그 앞에 뜻을 풀어주고, 문장 서술이 난해한 것들은 모두 쉽게 고쳤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민사
적절한 화해 · 조정안이 도출되었으나, 경미한 부분의 의견 차이가
  적절한 화해 · 조정안이 나왔으나, 가벼운 의견 차이가

  형사
구비해 놓았습니다.
  갖춰 놓았습니다.

  행정
직접 법정에 현출하는 방법으로
  직접 법정에 내놓는 방법으로

서울고법에서는 나의 의견을 대폭 받아들여 문장을 고치고 안내문을 제작하였다. 내가 보기에, 사법 관계자는 중학교 의무교육을 마친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말로 재판 절차 안내나 민원 문서, 판결문과 통지문 등을 써야 한다. 법률 언어야말로 국민에게 두루 영향을 미치는 공공언어 가운데에서도 가장 깊숙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알기 쉬운 공공언어로 헌법 다듬기

요즘 개헌의 시기와 권력 구조 문제를 둘러싸고 여야 정치권에서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나는 개헌의 내용이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발전시키는가도 중요하다고 보지만, 이참에 헌법을 알기 쉽게 다듬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헌법을 알기 쉽게 다듬는 일은 그 자체로 헌법 정신에서 비롯하는 의미를 지닌다. 헌법은 국민주권과 국가의 정체성, 국민의 권리와 의무, 권력 구조와 경제의 틀을 규정한 최고 법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삶을 뿌리부터 좌우한다. 따라서 헌법에서 규정한 국민의 행복 추구권과 평등권을 보장하기 위해 헌법은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알기 쉬워야 하며,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애써야 하는 국가의 의무에 비추어 우리말답게 써야 한다. 알기 쉬운 헌법으로 다듬자는 나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헌법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헌법이 쉬워져야 민법과 형법도 쉬워질 수 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대한민국의 법치의 줄기를 이루는 민법과 형법 따위 법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하던 일본의 법을 많이 베꼈던지라 법률 문장에 우리는 쓰지 않는 일본어 한자어와 말투, 낯선 한자어가 가득하다. 1987년에 마련되긴 했으나 지금의 헌법도 1948년 제헌헌법의 틀이 그대로 남아 있어 낯선 한자어와 일본어 말투 따위 손질할 게 많다. 게다가 2016년에 헌법재판소에서 공문서는 한글전용이 마땅하다고 판시했음에도, 우리 헌법은 국한문혼용으로 표기되었던 것이니 이젠 고쳐야 한다. 이는 민법과 형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국민의 관심이 모이지 않는다면 민법과 형법 같은 굵직한 법률의 용어와 문장을 손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8년에야 우리 민법을 제정했는데, 그때까지는 일제 치하에서 사용하던 일본 민법을 썼으므로 당시 만든 민법에도 일제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이를 다듬기 위해 2015년에 법무부에서 국회에 민법 개정안을 냈었다. 법률 내용에는 변화를 주지 않는 선에서 민법에 들어 있는 어려운 말들을 고치려던 것이다. 대표적인 수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식 한자어 개선
假住所(가주소) →  임시주소
窮迫(궁박) →  곤궁하고 절박한 사정
要(요)하지 아니 한다 →  필요하지 않다
貸主(대주) →  대여자
備置(비치)하여야 →  갖추어 두어야

 어려운 한자어 개선
懈怠(해태)한 →  태만한, 게을리 한
催告(최고) →  촉구
相對方(상대방)과 通情(통정)한 虛僞(허위)의 意思表示(의사표시) →  상대방과 짜고 거짓으로 한 의사표시
隣地(인지) →  이웃 토지
閉塞(폐색) →   막힌
溝渠(구거) →  도랑
堰(언) →  
放賣(방매) →  매각
胞胎(포태) →  임신
蒙利者(몽리자) →  이용자

  의미 이해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용어 개선
相當(상당)한 →   적절한
異議(이의)를 保留(보류)한 때에 →   이의(異議)를 단 경우에는
公然(공연)하게 →  공공연하게

  지나치게 줄인 말 개선
表意者(표의자) →  의사표시자
借地權(차지권) →  토지 임대차
그 倍額(배액) →  두 배의 가액
破毁(파훼)한 →  파손한

당시 법무부 '알기 쉬운 민법 개정 위원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자면, 어려운 한자어를 쉬운 말로 바꾸고 국한문혼용을 한글전용으로 표기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 민법 개정안은 19대 국회의원들의 무관심 탓에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았다. 말과 글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직 많은 지지자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헌법 개정이 모든 국민과 정치권의 관심거리가 된 지금 국가의 최상위 법인 헌법을 쉬운 말로 다듬는다면 민법과 형법을 다듬을 길도 열리지 않겠는가. 이는 법치의 민주화를 가져올 것이고,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민주주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헌법은 민주시민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교재라고 하겠다. 우리 국민 누구나 헌법을 읽으면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운영 원리,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익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국민 삶의 오늘과 내일을 규정하는 기본원리가 어떤 것인지 알기 쉽게 고쳐서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최상위 법으로서 새로운 법률 문장의 본보기가 되게끔 우리말다운 문장으로 다듬어야 한다. 그 핵심은 아래 두 가지이다.

첫째, 어려운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고, 우리말답게 문장을 손질해야 한다. 부속 도서(딸린 섬), 기망(속임) 따위 잘 쓰지 않는 한자어는 쉬운 말로 바꾸고, "모든 영역에 있어서"처럼 '~에 있어서',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처럼 '~에 의하여' 따위 일본 말투를 고쳐야 한다. 아홉 줄로 한 문장을 길게 적은 전문(머리글)도 손질하는 게 좋다.

둘째, 한자 능력에 따라 국민의 알 권리를 차별할 위험이 있는 국한문혼용 표기를 한글전용으로 바꿔야 한다. 2005년 제정된 국어기본법 제14조에서는 공문서의 한글전용을 규정하였고, 2016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공문서 한글전용 규정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면에서 전혀 헌법 정신에 어긋나지 않으며, 한자어를 반드시 한자로 표기해야 할 까닭은 없다고 판시하였다. 한문 시대에서 한글 시대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잠깐 나타났던 국한문혼용은 낡을 대로 낡은 표기 방식이고 소통에 방해가 되므로 반드시 한글전용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런 내용으로 여야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 '알기 쉬운 헌법'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50개가 넘는 단체가 모여 <알기 쉬운 헌법 만들기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청와대에 국민 청원도 넣었다. 우리의 청원에 뜻을 함께 한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동의합니다! 초등학교 교삽니다 아이들에게 하루에 한 조항씩 읽어줬습니다.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헌법 기대합니다."

(* 일부 글은 2017년에 낸 단행본 「언어는 인권이다」에서 가져와 다듬어 썼음을 밝힌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사단법인 한글문화연대는 2000년부터 우리말글을 아름답게 가꾸고 우리 말글살이의 잘못된 점을 바꾸어, 세계화의 거센 물결에서 잃어가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찾고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독창적인 한글문화를 일구고자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이건범 대표는 한글날 공휴일 추진, 쉬운 말 쓰기 운동, 한글 맞춤법 교실 운영 등 한글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