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저장소 국문학 연구는 나의 숙명, 김완진
‘기록’의 역사적 가치와 범주가 확장되면서 구술 자료의 가치와 역할도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다.
한글의 역사적인 시대를 함께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술 기록으로 남기고,
다면적 구술 기록의 수집을 통해 사건을 총체적으로 보존하는 일은 국립한글박물관의 주요한 활동 중 하나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지난 2015년도부터 한글문화인물 구술기록사업을 통해 구술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한박웃음은 디지털한글박물관에 보관된 구술 아카이브 자료를 요약해 소개하려 한다.
#01 교직의 숙명이 소년을 한글로 이끌다
김완진 교수는 만주사변이 일어난 1931년 태어나 1938년에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유년기를 회상하며 소학교 1학년 2학기 담임선생님이 ‘한글’을 가르치는 방식에 불만을 품었던 일화를 구술했다.
이어 자신이 교직에 나간 것을 숙명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이 그분의 창안이었는지 또는 그러한 흐름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분은 한글 자모를 기역(ㄱ), 니은(ㄴ), 디귿(ㄷ), 리을(ㄹ) 쭉 써 놓고
그것을 ‘그, 느, 드, 르,…’라고 읽어 놓습니다…(중략)
수업 중에 ‘나라면 저렇게 가르치지 않겠다.’ 하는 생각을 종종 가졌던 것을 생각하면
내가 교직에 나가게 된 것은 숙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02 격동의 현대사 겪어낸 청소년기
소학교를 마친 뒤 김완진 교수는 중학교를 서울로 진학하려고 했으나,
당시 전쟁으로 인하여 시대가 어수선하여 홍성에 주저앉았다가 해방 후 중앙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전세가 언제 서울을 불바다로 휩쓸지 모르는데 서울에 보낼 수 없다는 아버지의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아버지는 사람 사는 것이, 사람이 공부하는 것이 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건데,
죽을 위험이 있는 곳으로 아들을 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아버지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로하신다고 초등학교 졸업식 같은 것은 무시하고 서울 구경에 나섰는데,
서울은 벌써 많이 쓸쓸하고 공습에 대비한 소방로 개통을 위하여 멀쩡한 집들이 헐리고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03 지헌영 선생의 추천으로 교단에 서다
그는 1950년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입학하던 해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수업을 대전에서 하게 되었고
이때 인연을 계기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천구백오십오(1955)년에 그때는 충남대학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있을 때인데
과 회의에서 지헌영 선생이 발의하기를 서울대학 문리대에 김 아무개라고 하는 학생이 있었는데
지금 졸업했을 테니까 찾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하셨습니다.”
#04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을 거두었던 심학 이숭녕 선생과의 인연
학문적 영향을 주신 선생님으로 일석 이희승 선생님을 꼽으며 이희승 선생님은 학문을 하는 태도에서만이 아니라
생활양식과 태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라고 회고하였다.
또한 심학 이숭녕 선생님과는 입학 당시 면접장에서 첫 대면을 하였고
매우 강한 분인 것 같은 인상을 주었지만 실제로는 매우 약한 면을 엿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심악이 당신도 어렵게 공부한 내력이 있어서 어려운 학생들에 대한 동정이 지극한 분이었는데
한번은 연구실에서 한 후배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집안이 어려워서 더 이상 선생님을 뵙지 못하겠다고 하는
애절한 글을 써 보냈던 모양입니다…(중략)… ‘아이구 야단이구나.’ 하셨는데
결국 그 후배도 불러들어 세 사람의 식구를, 식객을 거느리고 계셨습니다.”
#05 ‘연구는 혁명적으로, 행정은 보수적으로!’
또한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조순탁 선생님, 동양사 고병희 선생님을 존경하였다.
“한번은 물리학 같은 분야는 그게 천구백육십(1960)년대니까
시설의 미비로 고충이 많으시겠다고 말씀을 건넨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조 선생이 ‘다 헛소리야. 공부는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으로 하는 것이지, 다 핑계야.’ 하시고,
또 ‘연구는 혁명적인 것이 좋지만 행정은 보수적이라야 해.’라고 말씀하셨어요.
이것은 내가 일생 명심한 교훈이었습니다.
행정을 혁명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지금도 내 머리에...”
#06 1980년 간행돼 큰 반향을 일으킨 《향가 해독법 연구》
그는 ‘향가해독연구’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음운과 문자의 체계연구 전반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80년에는 《향가 해독법 연구》를 간행했다.
“《향가해독법》(향가 해독법 연구)을 냈을 때 나는 저자용으로 메꿔 놓은 것을 남에게 나눠주지 않고
최소한도로 나눠주고 나머지는 집에 간직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매우 놀란 게 그게 천구백팔십(1980)년 십이(12)월 말에 발행됐으니까 아마 책방에 나간 것은
그다음 해 정월일 텐데 이(2)월 달 되기 전에 출판부에서 재판을 찍어야겠다고 하는 연락을 받고
나도 놀랬고 출판 부장도 놀랬다고. 곧 두 달 남짓 동안에 오백(500) 부가 매진됐다고.
‘그때까지 그런 종류의 책이 나오기를 말하자면 사람들이 갈망하고 있었구나.’ 하는 내 나름의 판단을 하게 됐습니다.
#07 ‘주석 체제의 전환’ 김완진 교수 연구의 알려지지 않은 성과
김완진 교수는 《향가 해독법 연구》의 특징을 꼽으며 주석 체계의 전환
그리고 선행 연구들에 대한 언급이 없던 학풍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로 구술을 마무리했다.
“그 책의 특징에 대해서 내가 이러니저러니 하는 말은 적절치 않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은 특징을 하나 말하고 싶습니다. 그건 주석 체제의 전환입니다…(중략)…
그러나 우리가 처한 시기는 고어사전도 여러 권 나왔고
사전에 보면 얼마나 되는지 유래가 나와 있는 것들을 굳이 장황하게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중략)…
앞으로 우리가 택할 길은 이런 거다 해서 내 저서에서는 비슷한 용례를 드는 것을 최소한도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요했다고 하는 건 내 저작이 나온 이후에는
그 밖에 주석 논의에서 과거에 마에마식의 체제가 사라졌다고 하는 것은 얘기할 수 있습니다.”
국어학계를 이끌며 국어사 연구, 훈민정음, 고대국어, 중세국어 등 국어학 연구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김완진의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아래 영상을 클릭!
- 지난 국어연구회 특강에 대해서- 입학 동기생 수와 관련된 내용- 2010년 부상과 수술 후 체력이 많이 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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