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저장소 서체 개발자, 이남흥
‘기록’의 역사적 가치와 범주가 확장되면서 구술자료의 가치와 역할도 나날이 중요해지고 있다.
한글의 역사적인 시대를 함께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술 기록으로 남기고,
다면적 구술 기록의 수집을 통해 사건을 총체적으로 보존하는 일은 국립한글박물관의 주요한 활동 중 하나이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지난 2015년도부터 한글문화인물 구술기록사업을 통해 구술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한박웃음은 디지털한글박물관에 보관된 구술 아카이브 자료를 요약해 소개하려 한다.
#01 학교 선생님들도 인정한 조각 재주
이남흥(1935년 출생)은 조선일보의 서체 개발자였다.
그는 충청북도 서산 출신으로 학생일 때부터 전각을 잘 파서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회상하며 이후 이것이 활자를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5학년 때인가 교장 선생이 내가 손재주가 있다고 해서 도장 파는 것
지금으로 말하면 엉성하게 생긴 조각도를 몇 개 주면서 도장을 파라고 해서 초등학교 직인을 팠어.
그래서 나는 그 직인을 찍은 도장을 가지고 졸업을 했어.”
#02 글씨를 잘 써 인쇄소에서 일했던 청년기
조선일보에 입사하기 전 글씨를 잘 써서 인쇄소에서
청첩장, 초대장, 명함과 같은 것도 많이 쓰셨다고 회고하였다.
“내가 글씨를 잘 쓰니까. 큰 글씨를 쓰는 게 아닌 작은 글씨를 잘 쓰니까,
인쇄소에서는 작은 글씨를 많이 써요. 청첩장, 이런 거. 시골에서는 책을 내는 인쇄소가 아니야.
청첩장이나 초대장, 명함 이런 것을 하는 사람들인데 작은 글씨를 잘 써야 돼요.
그래서 인쇄소를 조금 다니다 보니까…(중략)…여러 가지 직업을 다 손을 대봤어.
근데 다 시원찮아서 결국은 그 나이 먹도록 도장을 파고 있다가 조선일보에 들어갔죠.”
#03 조선일보 입사 후 글자 연구에 매진하다
이남흥 서체 개발자는 1976년 조선일보에 41살의 나이로 입사를 하여 1996년 조선일보를 퇴사하였는데,
입사 후 10여 년간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글씨를 써주는 등 글자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1985년 활자개혁위원회를 조직해 8종 3만 4,335자를 제작하고
1992년 조선일보 디지털 폰트 12종 27가지 크기 총 16만 7,936자를 개발 감수했다.
“20년을 했는데. 한 10년 동안은 회사가 크게 커지니까 확장하는 데에 대한 글씨를 써 줬어.
확장하려면 굉장히 많은 글씨를 써야 돼요. 그걸 쓸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그걸 했어.
말하자면 잡부 노릇을 했어.…(중략)…그렇게 하면서 한 10여 년 동안 하면서
글자에 대해서 연구를 해서 그러려고 시작을 했어.”
#04 납활자 전성기, 그의 손을 거쳤던 글꼴 개발
그가 조선일보에 재직한 1970, 80년대는 납활자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1982년, 84년, 87년 세 차례에 걸쳐 글꼴을 교체, 개발하였고
이 당시 시대적 요구 및 초점을 두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냥 활자를 개발한 거로 알지만 그게 아니고. 한 번을 그려서 수정을 또 해야지.
수정을 해야 되는데 전체를 수정하는 게 아니라 어느 어느 자를 뽑아서 수정을 세 차례를 했어.
세 번을 그린 게 아니야. 또 글자를 크게 조각을 하면 커지니까 그런 과정까지 다 겸해서
3차에 걸쳤다고 되어 있는데 매번 시험하는 거야, 시험판을 만들어서.”
#05 신문,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변화하다
당시 대부분의 신문이 세로쓰기를 차용하던 중,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해서 가로쓰기로 표기 방법을 바꾸었다.
그는 세로쓰기용 활자를 가로쓰기용으로 바꾸면서 해결해야 했던 문제점에 대해 설명했다.
“그래서 기둥에다가 기둥 글씨가 몇 퍼센트를 쓰고 기둥 글씨 아닌 것이 몇 퍼센트를 썼나 하는 것을 통계를 내.
기둥에서 꼭지를 하나 붙이는 것 때문에 면적이 많이 줄어들거든. 그래서 글씨를 크게 보이려고 해도 안 돼요.
그리고 기둥 글씨 꼭짓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글자를 크게 보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야.”
#06 CTS의 도입으로 사라진 납활자
납활자는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 컴퓨터식자시스템) 제작 방식이 도입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남흥 서체 개발자는 CTS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결과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CTS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신문은 첫째로 종이 질을 따져야 하고
잉크를 따져야 되고, 인쇄를 따져야 되는데 신문이라는 게 글로 써서 먹고 사는 거라고 하지만
사실은 광고로 먹고 사는 것, 광고 수입이거든. 그런데 광고를 하려면 선명한 광고를 내야될 거 아니야.
지금 컴퓨터도 엄청 발전했지만 CTS도 엄청 발전했어요. 인쇄물이 깨끗하게 나오거든.
그리고 문화의 기준치가, 인쇄물을 제일 깨끗하게 내는 게 문화의 기준이야. 그게 첫째야.
그래서 CTS로 안 갈 수가 없는 거야. 지금 와서 보면 CTS로 간 것이 굉장히 잘했다고 생각이 돼요.”
#07 후대 디자이너들, 글씨본 및 자료 수집에 힘쓰길
그는 한글 디자인에서 한글만큼 한자에 대한 이해 및 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후대의 디자이너들이 글씨본을 비롯한 자료를 수집해 연구에 참조하길 바란다고 구술했다.
“한글만 가지고 하면 금방 할 수 있어요. 한글이 몇 자 안 되니까.
그리고 지금은 이제 한글을 할 수 있는 기반이 확실하게 서 있잖아요.
나는 처음에는 내가 생각해서 글씨를 그려서 글씨가 되는 것인 줄 알았어.
그런데 글씨는 글씨본이 따로 있어요. 글씨본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자료로 수집을 해서,
글씨본을 놓고 여기에서 어떤 것을 골라서 쓸 거냐. 이런 것을 찾으면 얼마든지 좋은 서체가 나올 수 있어요.”
납활자의 전성기를 이끈 이남흥 서체 개발자의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아래 영상을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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