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정의 『동백꽃』 초판본(1938)
노란 동백꽃에 담긴 알싸한 청춘의 봄
김유정의 『동백꽃』 초판본(1938)
“너희 집엔 이거 없지?” 봄 감자로 전한 풋사랑
어느 강원도 산골에 열일곱 살 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마름의 딸인 동갑내기 점순이가 자꾸 눈에 거슬립니다. 점순이가 몸집이 작은 소년네 닭을 빼내어 몸집이 큰 제집 닭과 자꾸 싸움을 붙이기 때문입니다. 소년네 닭이 그집 닭에게 쪼이고 피를 흘리는데 점순이는 깔깔 웃으며 호드기를 붑니다. “이놈의 닭! 죽어라 죽어라.” 하면서요. 암팡스럽게 닭의 볼기짝을 때리기까지 합니다. 소년은 눈물이 핑 돕니다. 걱실걱실 일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여자애인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꼭 여우 같습니다. 심지어 소년의 아버지까지 놀립니다. 하지만 화가 나도 대거리 한번 할 수 없습니다. 점순이네는 집도 빌려주고 땅도 빌려주면서 소년 가족의 생계를 쥐고 있는 마름이니까요.
오늘도 또 우리 숫탉이 막 쪼키였다.
내가 점심을먹고 나무를 하러 갈양 으로 나올 때이었다.
산으로 올라스랴니까 등뒤에서 푸드득, 푸드득, 하고 닭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다르랴 두놈이 또 얼리었다.
- 김유정, 「동백꽃」(1936)
점순이가 왜 이렇게까지 우리 닭을 괴롭히며 약을 올리는 걸까, 소년은 생각해봅니다. 그러다 며칠 전 있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소년이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점순이가 살며시 다가와서 “느집인 이거 없지?” 하며 불쑥 봄 감자를 내민 겁니다. 평소에 데면데면 만나도 본척만척하던 점순이가 어쩐 일인지 그날은 시덥지도 않은 말을 걸고 깔깔거리더니 갑자기 김이 나는 감자 세 개를 내밀었습니다.
게집애가 나물을 캐러 가면갔지 남 울타리 엮는데 쌩이질을 하는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가지고 등뒤로 살몃이 와서
“얘! 너 혼자만 일하니?” 하고 긴치않은 수작을 하는것이다.
(중략) 게다가 조곰 뒤에는 즈집께를 할금할금 돌아다보드니
행주치마의 속으로 꼈든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것이다.
언제 구었는지 아즉도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세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느집인 이거 없지?” 하고 생색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 날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버리란다.
- 김유정, 「동백꽃」(1936)
점순이가 “너 봄감자가 맛있단다.” 하며 건네는데, 소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난 감자 안 먹는다. 니나 먹어라.” 하며 어깨 너머로 감자를 쓱 밀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점순이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돌아다보니 점순이의 얼굴은 그만 새빨간 홍당무가 되어 있었습니다. 눈에 눈물이 어린 점순이는 바구니를 집어들더니 저 쪽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년은 의아했습니다. 점순이는 부끄럼을 타는 여자애가 아니었거든요. 어른들이 언제 시집갈 거냐고 물어도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는 당돌한 여자애입니다. 화가 나면 소년의 등을 바구니로 한 번 후려치고 갈 성격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순이가 눈물을 보이며 돌아가다니요. 그리고 그 이후로는 괜히 닭싸움을 걸며 소년의 심기를 건드리는 겁니다.
거지반 집께 다 나려와서 나는 호들기소리를 듣고 발이 딱 멈추었다.
산기슭에 늘려있는 굵은 바윗돌틈에 노란 동백꽃이 소보록허니 깔리었다.
그 틈에 끼여앉어서 점순이가 청승맞게스리 호들기를 불고 있는것이다.
그보다 더 놀란것은 고 앞에서 또 푸드득 푸드득, 하고 들리는 닭의 횃소리다.
필연코 요년이 나의 약을 올리느라고 또 닭을 집어내다가
내가 나려올 길몫에다 쌈을 시켜놓고 저는 그앞에 앉어서
천연스리 호들기를 불고 있음에 틀림 없으리라.
- 김유정, 「동백꽃」(1936)
일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점순이가 또 소년네 닭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푸드득, 푸드득 하는 닭의 횃소리에 놀라 소년은 그만 나뭇지게를 벗어 던지고는 지게 막대기로 점순네 수탉을 내리쳤습니다. 수탉은 단번에 그대로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소년은, 점순이의 기세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습니다. 큰일을 저질러서 이제 집도 땅도 없어지겠구나 생각하니 소년은 울음이 절로 납니다. 그러는 소년에게 점순이가 다정스레 다가옵니다. 그리고 둘은 노란 동백꽃 속에 폭 파묻힙니다. 알싸한 그러면서도 향긋한 생강나무의 꽃내음과 함께 서툰 사랑 이야기는 끝을 맺습니다.
“닭 죽은건 염녀마라 내 안이를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바람에 나의 몸둥이도 겹처서 쓰러지며 한창 피여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움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듯이 왼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 「동백꽃」(1936)
김유정이 세상을 떠난 후 세상에 나온
첫 번째 단편집이자 유고집 『동백꽃』(1938)
소설 「동백꽃」은 김유정(金裕貞, 1908-1937)이 1936년 3월 24일 탈고하여 그해 5월 월간 잡지 『조광』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작품의 제목인 ‘동백꽃’은 소설에 딱 두 번 나오는데, 모두 ‘노란’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제시됩니다. ‘노란 동백꽃’, ‘알싸한 그리고 향깃한 그 내음새’의 표현을 통해 이 작품에서의 ‘동백꽃’은 생강나무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이자 작가의 고향인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라 했기 때문입니다. 생강나무꽃은 3월 중순께 피기 시작하여 봄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꽃으로 봄의 전령이라고도 불립니다. 김유정은 마치 봄처럼 찾아온 소년 소녀의 풋사랑을 ‘알싸한’ 생강나무꽃의 내음으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생강나무꽃은 잡지 속 삽화에도 닭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소설 [동백꽃]에서 나오는 ‘동백꽃’은 정확하게는 생강나무의 꽃으로 김유정의 고향인 강원도 지역에서는 생강나무를 ‘산동백나무’로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백꽃은 빨간색이지만, 생각나무의 꽃은 노란색으로 소설에서도 ‘노란 동백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라는 표현에서도 생강의 독특한 냄새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각종 병치레로 건강이 좋지 못했던 김유정은 1937년 3월 스물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후 1938년 12월 삼문사서점에서 그의 작품을 모아 유고집 『동백꽃』(1938)을 발간하게 됩니다.
삼문사서점의 기획 시리즈인 <삼문사 조선 문인 전집&> 10권 중의 하나였는데, 별다른 디자인이 없는 하드커버에 포갑이 있는 형태입니다.
이 초판본에는 「동백꽃」, 「금 따는 콩밭」, 「봄봄」, 「안해」, 「산골」, 「산골 나그네」, 「따라지」, 「떡」, 「만무방」, 「솥」, 「두꺼비」, 「봄과 따라지」, 「금(金)」, 「정조(貞操)」, 「야앵(夜櫻)」, 「가을」, 「심청」, 「어린 음악회」, 「연기」, 「슬픈 이야기」, 「땡볕」의 순서로 총 21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동백꽃』 초판본(1938)의 내용에 김유정이 『조광』(1936)에 발표했던 원문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1937년 김유정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출판사에서 옮겨 첫 단행본인데 오탈자,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부호 등의 교정 차원을 넘어 조사나 어미를 수정하여 원문과 글맛이 다른 부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교정한 경우> [발표 원문→초판본]
- 오늘도 또 우리 [숫탉→숫닭]이 막 [쪼키였다→쫓기였다]
- 그냥 해내는것이 [아니라→야니라]
- 바짝 바짝 내 기를 올리느라고 [그랬음→그랬옴]에 [틀림→틀립] 없을것이다
- [게집애→계집애]가 나물을 캐러 가면갔지
- 서로 만나도 본척만척하고 이렇게 [점쟎게→점잖게]
- [그럼→그렴] 혼자 하지 떼루 하듸?
- 날새가 [풀리드니→풀리더니]
- [아즉도→아직도] 더운 김이 홱 끼치는 굵은 감자세개가
- 난 감자 안 먹는다, [니→네]나 먹어라
- [여지껏→여기껏] 감으잡잡한 점순이의 얼굴이
- 그런데 고약한 그 꼴을 하고 [가드니→가더니]
- [그렇쟎어도→그렇잖어도] 즈이는 마름이고
- 농사때 양식이 딸리면 [점순네한테→점순데한테] 가서
- 우리 [씨암탉→씨암닭]을 꼭 [붙들어→붓들어] 놓고는
- 이놈의 [게짐애→계집애]
- 그대로 의젓이 [앉어서→앉아서]
- 닭이 [맞을적마다→마즐적마다] 지게막대기로 [울타리나→울타리를] 후려칠수 밖에
- [내가→내자] 도끼눈을 뜨고 다시 꽥 호령을 하니까 그제서야 울타리께로 쪼루루 [오드니→오더니]
- 나의 등뒤를 [향하야→향하여]
- 고개를 홱 돌리어 [바라봤드니→바라봤더니]
- 대거리 한마디 [못하는걸→못하는결] 생각하니
- 거진 반접시턱이나 [곧잘→곳잘] 먹는다
- 웅크리고 [앉어서→앉아서] 일을 할뿐이다
- 점순이도 입맛이 쓴지 [살을→눈살을] [찦으렸다→찦으렀다]
- 나는 [보다못하야→보다못하여] 덤벼들어서 우리 [숫탉을→숫닭을] [붙들어가지고→붓들어가지고]
- 너무 급하게 쌈을 [붙인것이→붓친 것이] 퍽 후회가 난다
- 나는 할 일없이 닭을 [반듯이→반드시] 눕히고
- 얼른 홰에다 감추어 [두었드니→두었더니]
- 암만해도 고년의 [목젱이를→목쟁이를] 돌려놓고 싶다
- 쌈을 시켜놓고 저는 그앞에 [앉어서→앉아서]
- 우리 [숫탉이→숫닭이] 피를 흘리고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럿다→이르렀다]
- 나도 한때는 [걱실걱실이→걱실걱실히] 일 잘하고 얼골 이뿐 [게집애→계집애]인줄 [알았드니→알았더니]
-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누질을 하다말구 [어딀갔어?→어딜갔어?]” 하고 [어딀→어딜] 갔다온듯싶은 그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 <틀린 원문을 그대로 인쇄한 경우> [발표 원문→초판본]
- 내가 점순이하고 일을 [저질렀다는→저질렀다는] 점순네가 노할것이고 (‘저질렀다가는’으로 교정하지 않음.)
- <조사나 어미 등을 수정한 부분> [발표 원문→초판본]
- 깜짝 [놀라서→놀라며] 고개를 돌려보니
- 즈집께를 할금 할금 [돌아다보드니→돌아보드니]
- 닭이 [맞을적마다→마즐적마다] 지게막대기로 [울타리나→울타리를] 후려칠 수밖에
- 점순이도 입맛이 쓴지 [살을→눈살을] [찦으렸다→찦으렀다]
- 또 쌈을 붙여 [놨으니→놓으니]
- [그보다→그보다도] 더 놀란 것은
- 그럼 너 이담부텀 [안그럴터냐?→안그럴테냐?]
- 나의 어깨를 짚은채 그대로 [픽→퍽] 쓰러진다
발표 원문과 초판 인쇄본의 이러한 차이점은 당시의 맞춤법에 따라 수정하려고 했던 의도에서 비롯하기도 했지만 잘못 교정한 경우도 있고, 조판 시 활자를 잘못 넣어 틀린 글자로 인쇄된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조사나 어미를 수정한 부분, 특히 부사 ‘픽’을 ‘퍽’으로 수정한 부분은 김유정이 의도한 본연의 글과는 다른 어감을 주기도 하는데, 출판사 측의 단순한 실수로 인한 것으로 넘겨보기에는 글맛이 달라지는 적극적인 변형 요소라 흥미롭습니다.
소설이 인기를 얻고 재판되면서 이야기의 주된 심상을 집약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노란 동백꽃’이 중부 이북지역의 노란 생강나무꽃이 아닌 남부지역의 빨간 동백꽃으로 잘못 그려지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삼문사서점의 초판본 『동백꽃』(1938)에는 표지나 내지에 삽화가 없었지만 세창서관의 재판본 『동백꽃』 (1940)에는 표지에 빨간 동백꽃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꽤 오래 이어집니다.
『동백꽃』에 담은 민중의 삶과 마음
일제강점기의 험난한 상황에서 김유정은 평범한 인물들이 겪는 곤궁한 상황을 토속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진짜 민중의 삶을 가차 없이 담아냈습니다. 소설 속에는 ‘대강이’(머리), ‘덩저리’(몸집), ‘목아지’(목), ‘주둥이’(입), ‘아르릉거리다’(부드럽지 못한 말로 자꾸 매우 크게 외치거나 다투다), ‘쪼간’(사건), ‘쌩이질’(한창 바쁠 때에 쓸데없는 일로 남을 귀찮게 구는 짓), ‘항차’(하물며), ‘얼병이’(얼뜨기), ‘후려쌔리고’(후려치고), ‘하비고’(파고), ‘감때사나운’(억세고 거친), ‘쟁그러워 죽겠다’(고소해 죽겠다), ‘가차히’(가까이), ‘할일없이’(=하릴없이. 어찌 할 도리가 없이), ‘권연물쭈리’(담배물부리), ‘목젱이’(목정강이), ‘싱둥겅둥’(건성건성), ‘호들기’(호드기), ‘여호’(여우), ‘알’(아래) 등 당시 강원 지역의 민중들이 쓰던 말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김유정은 사실적인 생활어들로 당시 농민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더불어 어리숙하고 순박한 남자 주인공, 영악해보이지만 누구보다 애정 표현에 미숙한 점순이 등 작품 속 인물에 투영된 김유정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그의 소설이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