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클릭 한 번으로 간편하게 프린트를 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손가락으로 글자판의 키를 눌러
종이에 글자를 찍어야지만 인쇄가 가능했다. 그런데, 우리가 쓰는 컴퓨터의 키보드 자판이 ‘타자기’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자판 표준안 제정 50주년을 기념하며
상설전시실 테마 전시로
<한글 타자기 전성시대>를 2019년 7월 25일부터 2020년 2월 2일까지 개최하고 있다.
한글은 어떻게
기계화됐을까?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 타자기 전성시대> 전을 통해 타자기가 한글의 글쓰기 도구로 널리 활용됐던 1970~80년대를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먼저, 한글 타자기가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타자기 변천사’부터 알아보자.
최초의 한글 타자기는 1914년 미국에 거주하던 이원익과 이진일이 영문 타자기에 한글 글쇠를 붙여 만들며 탄생했는데, 시력이 나빠질 정도로 사용감이 불편했다. 이후 사용자가 쉽게 익힐 수 있고 고른 모양의 한글이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송기주, 공병우, 김동훈 등이 다양한 방식의 타자기 자판을 개발했다. 이들의 노력이 모여 오늘날 널리 사용하는 2벌식 자판이 나왔으며, 손바닥만 한 휴대폰에서도 한글을 편리하게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글 전용 시대를 연
‘타자기’
본격적으로 전시실에 입장하면 한글 타자기 사용이 활성화된 이유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와 연관이 있다. 일제에 의해 우리글 사용을 금지 당했던 국민들은 광복 이후 한글로 나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한글 사용을 널리 확대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공문서를 한글로 쓴다는 내용’을 법률로 제정했다. 또한 한글학회에서는 1965년 한글날을 맞아 ‘한글 전용과 한글 타자기 사용이 우리 문화를 살리는 길’이라는 내용을 발표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특히 정부는 한글 전용을 확산시키기 위해 타자기를 보급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제작자마다 한글 타자기 자판이 달라 사용자들은 불편을 겪었고, 글자판의 통일이 시급해졌다.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과학기술처에서는 「한글 기계화 표준 자판안」을 마련해 타자기 자판을 4벌식으로 표준화하고 한글 전용 가속화에 박차를 가했다.
들불처럼 번진
한글 타자
배우기 열풍
이러한 정부의 노력 끝에 한글 타자기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1963년부터는 타자 교육이 실업계 고등학교의 교과목으로 편성되기도 했고, 이 시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마치 영어 자격증이나 컴퓨터 자격증을 따듯 타자기에 관련된 ‘스펙’을 쌓기도 했다. 그 예로 1970년 10월 9일과 10일에 열린 ‘제1회 공무원 및 제2회 전국 한글 타자 경기대회’가 열려 공무원, 은행 직원, 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실력을 겨뤘다. 1등에게는 대통령상을 수여하는 영광과 함께 부상으로 상금 10만 원이 주어져 그 경쟁률 또한 엄청났다.
더욱이 1978년 무렵 국산 표준 타자기가 개발되고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타자기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타이피스트’라는 직업이 인기 직종으로 떠올랐고, 가정에서도 한글 타자기의 이용도가 높아져 타자기를 무료로 대여해주는 곳도 생겨났다. 아울러 문인들의 글쓰기 방식도 변화했는데, 작가 한승원은 1970년대 초부터 타자기로 원고를 집필한 작가 1세대이다.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 상을 수상한 한강은 어려서부터 타자기로 소설을 쓰는 아버지 한승원을 보고 자랐고, 부녀가 나란히 같은 길을 걷게 됐다.
이처럼 타자기의 확산은 오늘의 정보화 시대로 가는 기반을 닦았다. 모든 것이 자동화된 디지털 세상에서 문득 아날로그가 그리워진다면, 국립한글박물관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