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빠르게 변화하며 새로운 것이 각광받는 현대 사회,
그 속에서도 오랜 세월 이어진 전통의 멋과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이들이 있다.
한글과 전통적 소재로 꾸준히 예술 활동을 해온 김도영 작가가 그렇다.
한옥과 한글을 활용한 예술 작품을 만들며
한국적인 소재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김도영 작가를 만나보았다.
안녕하세요. 한옥과 한글을 주제로 한국화 및 디자인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작가 김도영입니다. 그동안 국립한글박물관 전시를 흥미롭게 봐 왔고,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가끔 박물관을 방문하거나 박물관 누리집에 종종 접속하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한박웃음’에서 독자분들께 인사드리니 감회가 새롭네요.
저는 배우자의 유학 때문에 미국에서 몇 년간 거주했었고,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아이에게 사회 과목을 직접 가르친 적이 있는데요. 이때 한옥의 모양에 따라 한글의 자음을 빌어 이름을 붙였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그래서 기역 자 한옥, 니은 자 한옥, 디귿 자 한옥을 직접 그림으로 그려 설명했는데요. 기역, 니은, 디귿 외에 리을, 미음, 비읍, 키읔, 티읕도 제 작업 분야인 한국화로 제작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던 중 2013년 세종문화회관 한글갤러리의 한글 관련 전시 공모에 이 아이디어가 담긴 기획안을 제출했고, 공모전에 선정돼 <한옥에서 한글을 보다>의 전시 기회를 얻게 됐어요. 이 덕분에 현재까지 한글과 한옥 주제의 작품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작업 초반에만 해도 한글 작품은 한옥을 주제로 한 한국화로만 마무리하려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한옥과 한글이 형태가 모두 맞추어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죠. 하지만 매년 한옥 주제의 작품 발표를 하면서, 채워지지 않은 자음의 모양이 제게 계속 숙제 같이 느껴졌어요. 결국 지속적인 수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한때는 작품 소장자를 표시하는 인장, 장서인(藏書印) 작업에 몰두했었는데요. 이때, 완성된 한옥 한글을 전각처럼 하나씩 새기기 시작해서 1년 동안 자모음 24개를 완성하게 됐죠. 이 작품을 활자의 기본이 되는 종자(種字)처럼 문자 작업에 활용해 타이포그래피와 같은 디자인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레이저커팅 기술을 이용하여 입체적인 반 부조(浮彫)작업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점차 작업 영역이 넓어졌고, 이 작업물을 모아 2019년 세종시에서 열린 <한옥에서 한글을 보다 II> 전시를 열었습니다.
▲ 디지털 인쇄 작업물
▲ 레이저 커팅
-종이 작업물
▲ 레이저 커팅
-나무 작업물
▲ 레이저 커팅
-한지 작업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한글 주제의 작업을 한국화와 전각, 디지털인쇄, 레이저커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 해왔는데요. 한지와 전통 채색 물감을 이용한 한국화는 담백하고 잔잔한 감정을 전해줘요. 전각 작업은 직접 돌에 새기는 일이라 쉽지 않았지만 완성된 작품은 거친 돌 느낌의 독특한 문양으로 이후 다양한 다른 디자인 작업을 탄생하게 해준 참 고마운 작업물입니다.
▲ 레이저 커팅을 활용한
<너와 나의 암호말> 부분
(120x200cm, 아크릴, 2020)
▲ 레이저 커팅을 활용한
<아리랑>
(189x96cm, 아크릴, 나무, 한지, 2019)
제 작품 중 <훈민정음 서문>, <서시>는 디지털인쇄 작품인데요. 회화 작업이 아니라서 그런지 디자인에 활용하는 패턴 느낌이 나요. 부조 작품인 <아리랑>은 나무에 레이저커팅 방식을 활용했는데요. 처음에는 디자인 업체의 도움을 받아 레이저커팅을 했지만, 맡겨서 하기에는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어 제가 직접 기술을 배웠어요. 덕분에 기계로 다채로운 재료를 자유자재로 잘라 <달같이>, <나너우리>, <길> 등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고전, 시 그리고 우리 노랫말 등의 문학작품을 한글 자모음 배열 작업으로 서술 및 재현하고자 해요.
▲ <한글 한옥에서의 일상>
각 65x65cm, 분채, 한지, 2019
▲ 전시장 모습
한글 관련 작품 전시에는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많이 찾아와요. 전시장에서 작품을 볼 때 아이들과 어른들의 반응이 다른 게 인상 깊었는데요. 아이들은 그림을 보면 “기역, 니은, 디귿….” 한글로 읽기 시작해요. 반면, 어른들은 “이 한옥은 어디에 있는걸 보고 그렸냐”며 한옥의 모양을 먼저 봐요. 이럴 때, 각자에게 작품을 ‘한글 모양의 한옥’이라고 설명해주면 아이들은 작품을 한옥으로, 어른들은 한글로 인식하죠.
그 다음에는 관람객에게 각 한옥 그림의 자음으로 시작하는 사물을 찾아보라고 권합니다. 예를 들어 기역 자 한옥 작품이면, 그 그림 속에 기역으로 시작하는 사물이 그려져 있거든요. 그래서 대부분 관람객은 그림을 두, 세 번쯤 다시 살펴보며 그림 앞에서 천천히 머물다 가곤 하죠.
▲ <한글 한옥 자석판>
체험용
▲ 기획전시 <한글꽃이 피었습니다> 전시 설명
저는 이전에 한글 프로젝트 전시 <문자예술>에 참여해 미디어, 타이포그래피, 설치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문자 작업물을 만났고, 교육 자료 <한글 한옥 자석판>을 제작해 전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 적도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의 기회를 통해 인쇄물 표지디자인, 문화상품 제작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기도 했어요.
또한, 최근에는 세종시의 BRT작은미술관의 <한글꽃이 피었습니다> 전시에 전시기획자로 참여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한글을 좀 더 깊이 연구하게 됐고, 전시장에서 작가, 시민들과 만나면서 한글에 대한 저의 애정이 더욱 각별해졌죠.
이처럼 다채로운 작업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한글’ 그 자체입니다. 24개의 자모음이 모여 무한한 소리와 글자를 만들어 내듯이, 한글은 제 작업 안에서 무한한 작품의 소재로 작동하고 있어요. 한국화에서 멈출 줄 알았던 저의 한글 작업이 지금도 여러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 걸 보면 앞으로 또 어떤 작업으로 확장될지 기대됩니다.
한글이 ‘추상적이면서 기호적인 이미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글은 소리의 모양을 상상하면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하나의 추상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한 추상적 작품을 기호화함으로써 다양한 한글 서체가 탄생하고, 추상적인 이미지가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어 여러 작업에 적용할 수 있기에 한글과 관련된 다채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한글은 제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과제와도 같습니다. 현재 저는 한글을 시각적으로만 활용하고 있지만, 한글은 의사소통의 도구기 때문에 ‘읽히는 한글’에서 더 나아가 ‘느끼는 한글’, 즉 사유적인 교감까지 보여주는 작업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저는 한글 작품과 한옥 작품을 번갈아 작업하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한글 작품인 <훈민정음 서문Ⅱ>를 한지로 작업하여 마무리했으니 다시 한옥 한국화 작업을 하기 위해 붓을 잡아야겠네요.
그리고 앞으로는 한글 관련 작업을 설치나 영상작업으로도 연결해보고 싶어요. 이를 통해 저의 작업이 한글을 알리는 예술로 자리 잡기를 바라며, 한옥·한지·한국문학 등 한국적인 정서의 소재까지도 두루 포함한 작품으로 확장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