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문자로 나타내 청각장애인과 세상을 연결하는 이시은 문자통역사는
한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청각장애인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한글을 사용해 청각장애인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안녕하세요. 저는 9년 차 프리랜서 속기사 이시은입니다. 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을 지원하는 에이유디 사회적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서 문자통역 일을 주로 하고 있어요. 속기 업무를 하다가 연이 닿아서 문자통역을 하게 되었는데요. 하다 보니 문자통역 일이 다양해서 재미있기도 하고, 성향에 더 잘 맞았어요. 또 청각장애인의 복지에 대해 생각도 많아지고 사명감도 생겼어요.
속기사는 빠르게 기록을 하는 일을 해요. 한글 속기 자격증도 필요하고요. 문자통역사도 속기사에 속하는데요. 예를 들어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사람 중에는 번역가가 있고 동시 통역가가 있잖아요. 문자통역사는 일종의 동시 통역가인 거죠.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상황을 문자로 나타내는 일을 해요. 우리는 어디를 가도 무언가를 듣잖아요. 그 때문에 문자통역사는 청각장애인이 살면서 활동하는 모든 곳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많이 찾아볼 수 없죠.
속기는 법원, 국회 속기 외에도 굉장히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데요. 정부 행사나 각종 워크숍, 강연 등 많은 곳에서 속기가 필요해요. 요즘엔 코로나19 때문에 대부분의 행사를 비대면으로 진행하다 보니 비대면 행사 내용을 실시간 자막으로 제공하는 일도 많아졌어요. 교육방송에 흐르는 자막도 그런 속기 작업이고, TV 설정에 따라 방송에서 실시간으로 자막이 보이는 ‘폐쇄자막’도 속기사들이 바로바로 치고 있는 거예요. 이외에도 영화나 드라마 영상을 글로 풀어주거나 경찰의 심문 내용을 받아적는 일도 하죠.
서울대학교에서 4년 정도 청각장애인 학생 옆에 앉아 수업내용을 문자로 통역했어요. 저처럼 장애 학생을 도와주는 사람을 ‘도우미’라고 부르는데요. 문자통역이 필요한 수업을 장애 학생이 신청하면 대학교 내 장애 학생 지원센터가 학생과 도우미인 저를 연결해줘요. 그러면 저는 그 학생과 신청 수업을 한 학기 내내 같이 듣는 거예요. 진짜 대학생처럼 시간 맞춰서 시간표를 짜고 학교에 가요.
또한 초·중·고교 수업을 지원하거나 청각장애인 학부모님을 위해 면담 내용을 문자로 통역하기도 했어요. 결혼식, 교회예배 때 문자통역을 신청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요새는 공연 문자통역을 많이 의뢰받았고, 청각장애인이 심리 상담을 받을 때도 문자통역을 한 적이 있어요.
예전에는 수필속기라고 해서 일일이 손으로 받아썼지만, 지금은 속기 타자기를 사용해요. 속기 타자기는 속기에 좀 더 적합하게 만들어진 키보드인데요. 타자뿐만 아니라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합니다’처럼 자주 사용하는 단어나 조사는 키를 누르면 한 번에 바로 나오도록 약어를 등록할 수 있어요. 속기로 회의록을 작성하는 경우, 먼저 현장에 참석해서 회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들으며 초안을 작성해요. 이후에 녹음본을 계속해서 다시 듣고 내용을 수정해서 완벽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요.
문자통역은 그 자리에서 바로 내용을 전달하는 일이라 좀 더 신경을 써야 해요. 사전에 행사 관련 자료를 철저히 숙지해야 하고 문자통역 중에는 한 글자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죠. 공연 문자통역을 할 때는 서체도 고려하는데요. 서체는 가독성이 가장 좋은 돋움체를 기본으로 쓰되 공연에서 중요하거나 긴박한 대목은 궁서체로 표현하기도 하고, 어린이극은 귀여운 손글씨 서체를 사용하면서 글자 크기를 크게 해요.
우리나라 속기 타자기는 한글 구조에 맞게 만들어져있지만, 두벌식인 일반 키보드와는 조금 다른 세벌식 키보드를 쓰죠. 초성·중성·종성으로 자리가 나누어져 있어서 ‘강’을 치려면 초성 기역과 중성 아, 종성 이응을 한 번에 누르면 돼요. 이런 구조라서 타자를 빨리 칠 수가 있는데, 속기 타자기를 쓰다 보면 한글이 굉장히 효율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주로 콘서트에서 문자통역했을 때가 기억이 많이 나는데요. 가수 윤하의 콘서트에서 문자통역을 했을 때랑 청각장애인 분이 ‘멜론 뮤직 어워드’를 관람하실 때 함께 가서 문자통역을 한 게 기억이 나네요. 노래를 문자통역할 때 보통은 한 문장씩 자막을 띄우는데, 자막을 노래 속도에 맞춰 읽는 걸 좋아하시는 이용자분들이 있으시거든요. 그런 경우에는 저도 리듬을 타면서 노래 속도에 맞춰서 자막을 쳐요. 타자 치는 것은 힘들었지만 관객 반응이 좋아서 기억에 남아요.
소리가 들리든 들리지 않든 상황을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고,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공백을 메우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요. 그래서 분위기가 중요한 공연에서는 사투리를 쓰는 배우가 나오면 대사를 그대로 받아써요. 지인 모임이나 워크숍 등 분위기가 비교적 가벼운 곳에서는 누군가 웃으면 ‘ㅋㅋㅋ’처럼 자음을 쓰기도 하고 이모티콘도 사용해요.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같이 웃고 소통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왜 웃는지 눈치 볼 필요 없이 그 시간을 자연스럽게 함께 보내는 것이 오·탈자 하나 덜 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글은 ‘미완성의 과제’ 같아요. 문자통역사인 저는 한글을 의미전달 도구로만 사용하고 있잖아요. 우리는 목소리와 말투도 다 다르고 거기서 오는 느낌도 다른데, 문자통역만으로는 그걸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한글디자인을 활용하면 가능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특히 공연에서 아쉬움을 많이 느끼거든요. 저는 한글의 여러 가지 특징을 다채롭게 사용할 수 있는 그런 문자통역사가 되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취재하여 작성된 내용으로,
국립한글박물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