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국립한글박물관)
일제강점기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상황 속,
대중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것은
바로 ‘노래’였습니다.
당시 대중들은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요?
일제강점기 대중의 심금을 울린 노래는 무엇이었는지
한글 노래책과 가사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대중가요
▲ <붉은 장미> 가사지
작자: 오케레코드 발행 / 시대: 1930~40년대 / 크기: 12.5 x 18.8cm
일제강점기에도 대중들의 정서나 취향을 반영한 대중가요가 있었는데요.
유성기 음반 레코드의 황금기였던 1930년대에는
레코드 회사들이 음반 기획제작부터 소속 가수들의 이미지 마케팅까지 했답니다.
당시 경성 5대 레코드사로 콜럼비아, 빅타, 포리돌, 오케, 태평 레코드가 있었고
레코드사에서 노랫말을 만드는 부서를 ‘문예부’라고 불렀습니다.
문예부
▲ 일제강점기 레코드사에서 발행한 가사지들
작자: 포리돌레코드·오케레코드·태평레코드 발행 / 시대: 일제강점기 / 크기: 12.9~13.5 x 18.7~19.0cm
문예부에서는 음반을 기획하고 노랫말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대중의 정서나 취향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문예부장에 발탁됐는데요.
문예부장에게는 작사가 제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시인 혹은 극작가 출신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들이 만든 가사지에서는 작사를 ‘작시(作詩)’ 혹은 ‘시(詩)’라고 적어
당시 노랫말의 위상이 시와 비슷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민요
▲신민요 <노들강변> 가사지
작자: 오케레코드 발행 / 시대: 1930~40년대 / 크기: 18.1 x 12.8cm
오케레코드는 전국의 민요를 발굴하고 채록하면서
우리 음악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민요를 대중화하고자 했는데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에 등장해 유행하던 민요를 ‘신민요’라고 불렀습니다.
그중 작곡가 문호월과 신불출이 만든 <노들강변>은
세상의 한을 물에 띄워 보내려는 심정을 노랫말로 표현한 곡인데요.
앨범 발매 이후 경기 명창이 불러 경기 민요로 알려져 있을 만큼 전통적 색채가 짙지만,
김세레나, 패티 김 등 유명 가수가 리메이크하여 오늘날까지 애창되고 있는 곡이랍니다.
창작동요
▲ 동요집 『반달』에 실린 동요 <설날>
일제강점기에는 학교에서 일본 창가만 가르쳤고
정작 조선 어린이들이 부를 우리 노래는 부족했습니다.
이 시기 노랫말은 나라를 잃은 가슴 아픈 현실 때문에
현실에서 벗어난 상상이나 동화 속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삼았는데요.
윤극영의 <반달>과 <설날>이 당시 창작동요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동문학가, 작곡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동요들은
잡지, 동요집, 방송 매체나 교회 등을 통해 보급되었답니다.
윤극영 <반달>
▲ 동요집 『반달』
▲ 『반달』에 실린 동요 <반달>
윤극영은 어린이 문화 운동을 펼친 ‘색동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어린이들에게도
꿈과 용기, 희망을 주는 동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때문에 1924년 최초의 동요단체 ‘따리아회’를 조직하고 지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집 『반달』을 제작했는데요.
수록곡 중 우리에게도 유명한 <반달>은 어린 시절 시집갔던 큰 누나가 고생만 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느낀 슬픔을 담아낸 곡이랍니다.
동요집 전성시대
▲『조선동요백곡집』 표지와 내지
▲『유희창가집』 표지와 내지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집 『반달』 간행 이후
창작동요집이 활발하게 발간되었는데요.
홍난파는 어린이의 민족정신을 기르고 정서 발달에 도움을 주고자
『조선동요백곡집』을 편찬했습니다.
이외에도 강신명의 『아동가요곡선 삼백곡』,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인 이화유치원에서
출판한 유아용 동요집 『유희창가집』 등을 통해 동요가 보급됐답니다.
한글로 적어 내려간 가사 속에는
일제강점기 대중들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도 노래는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소중한 매개체인데요.
현재 국립한글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어린이 노래>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한글 가사지와 가사책을 직접 만나 노래가 주는 감동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