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웃음 참여 행사

  • 하늘색 배경이 있고, 왼쪽 상단에 ‘6월 참여 행사’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 제주도 모형이 있으며, 모형에는 제주도의 명물인 귤과 돌하르방·말 등이 있다. 오른쪽 하단에 여섯 명의 사람들이 있다. 세 사람은 파란색 표지의 책을 펼치고 있으며, 한 명은 박수를 치고 있다. 한 명은 악기를 불고 있으며, 또 다른 한 명은 책을 펼친 사람의 팔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참여 행사 나도 제주 사람 도전!
    알맞은 제주도 방언은?
  • 한박웃음
    소식지의 이름 ‘한박웃음’은
    2018년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름으로
    ‘함박웃음’에서 착안한 이름입니다.
    ‘한박웃음’에서 ‘한박’은 국립한글박물관을
    의미합니다.
    ‘한박웃음’의 글씨는 ‘민체民體’로 유명한
    여태명 교수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 한박웃음
    소식지의 이름 ‘한박웃음’은
    2018년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름으로
    ‘함박웃음’에서 착안한 이름입니다.
    ‘한박웃음’에서 ‘한박’은 국립한글박물관을
    의미합니다.
    ‘한박웃음’의 글씨는 ‘민체民體’로 유명한
    여태명 교수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기획 기사 사진. 청록색 배경에 여섯 개의 족자가 있고, 왼쪽 족자부터 세로로 훈민정음의 내용이 적혀 있다. 세 번째 족자 왼쪽에 녹색 옷을 입고 갓을 쓴 사람이 붓을 든 채 서 있고, 족자 아래에는 녹색 옷을 입고 갓을 쓴 사람이 족자를 올려다보고 있다. 네 번째 족자 오른쪽에는 사다리에 올라선 사람이 있다. 그 옆으로 사람 두 명이 있는데, 족자를 쳐다보고 있다.

기획 기사 한글로 나라를 지키고,
한글로 세상을 일깨우다

현충일이 있는 6월이 오면 우리 민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분들의 헌신에 대해 추모하고
가슴 깊이 감사하게 된다.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보훈의 달을 맞아 문자의 독립을 이루어내신
세종대왕을 비롯하여 국어학자, 시인, 외국인, 교사, 의사, 글꼴 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글을 지키고 널리 알리기 위해 힘쓴 한글 위인들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한글로 나라를 지키려 한 분들, 사회의 편견에 맞서 한글 보급에
이바지한 분들, 한글로 새로운 시대를 펼친 분들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며,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의 소중함과 가치를 되새기는 달이 되기를 바란다.

한글 창제로 문자 독립을 이룬 세종대왕과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한 집현전 학사들

여섯 명의 사람이 둥글게 앉아 있고, 왼쪽부터 첫 번째 사람과 다섯 번째 사람이 붓으로 글씨를 쓰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의 오른쪽에 ‘훈민정음’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조선의 제4대 왕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은 한자를 몰라 자신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1443년 우리 고유의 문자 한글을 만들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 정신,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글자가 필요하다는 자주정신, 실생활에 쓰임이 있어야 한다는 실용 정신이 녹아 있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는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鄭麟趾, 1396-1478)와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등 집현전 학사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세종대왕을 도와 문자 훈민정음의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1446년에 완성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새로 만든 문자 28자의 제자 원리, 사용법 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또한, 이들은 훈민정음(한글)을 이용해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다양한 책들을 편찬하며, 세종대왕이 새로 만든 문자인 한글을 사람들이 익히고 사용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세종대왕이 빨간색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있다. ▲ 세종대왕 어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제공

‘용비어천가’가 펼쳐져 있고, 한문과 옛 한글로 이뤄진 내용이 왼쪽 페이지와 오른쪽 페이지에 적혀 있다.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659년(1447년 초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홍길동전을 남긴
조선의 이단아, 허균

상투를 튼 한 남성이 책상 앞에 앉은 채 공책에 뭔가를 쓰고 있다. 남성의 오른쪽에 ‘홍길동전’이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현실의 부조리와 사회의 불평등을 비판하면서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아갔던 개혁가이다. 허균은 조정에서 자주 탄핵을 당했으며 역적모의를 했다는 누명을 쓰고 능지처참을 당해 죽는 등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소설 《홍길동전》은 조선 후기에 한글 소설로 널리 읽히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한글 소설 《홍길동전》은 적서 차별, 정치 관료들의 부정 등 사회 부조리에 맞서 투쟁하는 주인공 홍길동의 영웅적인 모습을 다루었다. 허균은 엄청난 독서가로 고전부터 동시대에 나온 책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읽었다. 그가 책을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지식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는 힘이었다.

갓을 쓰고 상투를 쓴 채 손을 포갠 허균이 서 있다. ▲ 허균 표준 영정 권오창 그림
교산난설헌선양회 제공

왼쪽에 한문으로 ‘홍길동전’이라고 쓰인 책의 표지가 있고, 오른쪽에는 옛날 한글로 쓰인 ‘홍길동전’의 내용이 세로로 적혀 있다. ▲ 홍길동전(洪吉童傳) 경판본 조선 후기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한글로 외국어 교재를 펴낸
역관, 최세진

두 명의 남성이 있다. 왼쪽의 남성이 중국어로 무언가를 묻고 있고, 오른쪽 남성이 “나는 북경으로 갑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최세진(崔世珍, 1468~1542)은 역관의 집안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중국어를 공부하고 이문(吏文, 중국과의 외교문서 작성에 사용된 특수문체 서식)을 익혔다. 그는 중인 신분임에도 뛰어난 능력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문신의 길에 들어섰으며, 통번역가로서 중국과의 외교에도 이바지하여 양반들도 오르기 힘든 종2품의 벼슬까지 올랐다. 최세진은 어린이들을 위해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편찬했는데, ‘기역, 니은, 디귿’ 등의 오늘날 한글 자음과 모음의 이름이나 순서가 이 책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중국어 회화 학습 교재인 ≪노걸대≫, ≪박통사≫ 등을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했다. 그는 당시 지식사회의 근본을 이루었던 한자나 중국어의 학습을 위한 교재를 한글로 펴내 한글의 대중화와 보편화에 기여했다.

왼쪽과 오른쪽에 책 ‘훈몽자회’의 본문이 있다. 왼쪽에는 세로로 적힌 한자와 그 음이 나와 있다. 오른쪽에는 책이 펼쳐져 있으며, 세로로 한자와 한글이 적혀 있다. ▲ 훈몽자회(訓蒙字會) 17세기(1527년 초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한글을 널리 퍼뜨린
개척자, 주시경

한복을 입은 남성 다섯 명이 있다. 가운데 남성이 오른손에 책 한 권을, 왼손에 보따리를 들고 있다. 가운데 남성 왼쪽에 보자기로 싸여 있는 책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말의 소리’라는 책이 있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 민족의 정신이 담긴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평생을 바친 한글학자이다. 1896년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만드는 일을 도와 대중들을 깨우치게 하고,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여 한글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1911년부터는 첫 우리말 사전 원고인 ‘말모이’ 집필을 주도했으며, 우리나라 글자에 '한글'이라는 이름을 지어 퍼뜨리며 한글 보급에 힘썼다. 1914년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발전시켰다.

콧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주시경의 사진이 있다. ▲ 주시경 사진
한글학회 제공

왼쪽에 ‘말모이’라고 적힌 책이 있고, 오른쪽에는 책 속 ‘ㄱ’과 ‘가’에 대한 내용이 있다. ▲ 말모이 원고 1914년경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한글로 섬세한 감정을 담은
청년 시인, 윤동주

검은색 교복을 입은 남성이 의자에 앉은 채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윤동주(尹東柱, 1917~1945)는 문학을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꾼 식민지 조선의 청년이자,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시인 중 한 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쓴 ‘시’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는 일상에 많이 쓰이는 시어로 우리말과 글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섬세한 내면의 감정과 솔직한 고백을 담아냈다. 그는 열망하던 시집 발간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의 형무소에서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48년에야 지인들의 도움으로 단 하나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발간되어 세상에 공개되었고, 윤동주와 그의 시는 세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학사모를 쓰고 학사복을 입은 채 정면을 보고 있는 윤동주의 사진이 있다. ▲ 윤동주 연희전문학교 졸업 사진(1941년)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기록관 제공

파란색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적힌 책이 있다. 제목의 아래에는 한자로 ‘윤동주’라고 쓰여 있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발행 1948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한글로 아동 교육에 이바지한
문학가, 방정환

모자를 쓰고 정장에 코트를 입은 한 남성이 앉은 채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은 오늘날과 달리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했던 시절에 아동의 권리를 세우고 그들을 교육하는 데 앞장선 아동 운동가이자 문학가다. 1923년 방정환의 주도하에 어린이들을 위한 잡지 《어린이》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어린이》는 당시 십만 명이 넘는 독자를 모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어린이》가 발행되었던 때는 우리말과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시기였지만, 그는 한글의 역사와 맞춤법에 대한 다양한 읽을거리와 <성냥팔이 소녀>, <백설공주> 등과 같은 외국 동화를 쉽고 재미있게 한글로 번안한 작품들을 실어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아동 운동에 평생을 바친 방정환은 193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만든 ‘어린이날’은 지금까지도 아동의 소중함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사진 네 장이 있다. 왼쪽에는 한 남자 아이의 사진이 있고, 오른쪽에는 모자를 쓰고 정장에 코트를 입은 방정환의 사진이 있다. 방정환의 사진 아래에는 어린이들과 함께 앉아 있는 남성의 사진이 있고, 그 아래에는 세 명의 성인 남성 사진이 있다. ▲ 『신여성』 제5권 제8호(방정환 추모 특집호)
「소파의 앨범에서」 개벽사 발행 1931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상단 가운데 ‘어린이’라고 적힌 종이가 있다. ‘어린이’ 아래로 글이 있는데, 세로로 쓰였다. ▲ 어린이 창간호 개벽사 발행 1923년
개인 소장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외국인이 있다. 그의 왼쪽에 ‘사민필지’라는 책이 있고, 오른쪽에는 세계 지도가 있다.

헐버트(H.B. Hulbert, 1863~1949)는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된 미국 출신의 외국인이었지만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다. 1886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대한제국 왕립 영어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한국에 와서 학생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쳤으며, 고종황제의 특사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그는 한국의 훌륭한 문화와 역사,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편 1889년 한글로 쓴 최초의 세계지리 교과서 《사민필지》를 출간하며 한국인들에게 세계의 지리 지식과 문화를 알렸다. 1907년 그는 일제의 탄압으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광복 이후 1949년 그는 국빈으로 초청되어 대한민국 땅을 다시 밟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한국에 대한 헌신과 사랑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큰 감명을 주고 있다.

수염을 기르고 양복을 입은 채 앉아 있는 헐버트의 사진이 있다. ▲ 헐버트 사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제공

‘사민필지’가 펼쳐져 있는데, 왼쪽에는 세계 지도가 있고 오른쪽에는 한글로 적힌 글이 있다. 글은 세로로 적혔다. ▲ 사민필지(士民必知)
1889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한글 점자를 만든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
교육자, 박두성

한 남성이 점자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책을 읽고 있다.

박두성(朴斗星, 1888~1963)은 평생 시각장애인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위해 헌신한 교육자이다. 1913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교육 기관인 조선총독부 내 제생원 맹아부에 부임한 이후 시각장애인 교육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는 학생들이 일본어 점자책으로 공부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1926년 시각장애인들이 읽기 쉽고 배우기 쉬운, 한글로 된 점자 ‘훈맹정음’을 만들었다. 그는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훈민정음’을 만든 것처럼, 시각장애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맹정음’을 만든 장애인 교육의 선각자로서 권학 정신, 생활 자립을 위한 교육 강화 등을 강조하여 우리나라 시각장애 교육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콧수염을 기른 채 앉아 있는 박두성의 사진이 있다. ▲ 박두성 사진
송암점자도서관 제공

‘훈맹정음’ 내용이 있다. 한글과 이를 가리키는 점자가 함께 나와 있다. ▲ 훈맹정음(訓盲正音) 1926년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타자기로 한글 사랑을 꽃피운
안과의사, 공병우

안경을 쓴 한 남성이 타자기를 두드리며 무언가를 쓰고 있다.

공병우(公炳禹, 1906~1995)는 타자기와 컴퓨터 등에서 한글을 빠르고 간편하게 입·출력할 수 있는 세벌식 체계를 구현하기 위해 매진한 한글 기계화의 선구자이다. 공병우의 원래 직업은 안과 의사였으나 한글학자 이극로를 만난 후로 한글의 중요성에 눈을 떠 한글을 초성자, 모음자, 받침자로 분류한 세벌식 체계를 마련하고 이를 타자기 등의 기기에 적용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49년 그는 한글을 빠르게 입력할 수 있는 세벌식 타자기를 발명하여 우리나라와 미국의 특허를 받았다. 1980년에는 최초로 세벌식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했으며, 1988년 한글문화원을 설립하여 젊은 프로그래머의 활동을 지원하고 남북한 자판 통일 문제도 연구했다. 그는 한글 기계화를 뿌리내리고, 한글의 과학성과 실용성을 컴퓨터에서 구현하는 데에도 앞장선 선각자였다.

안경을 쓰고 수염을 기른 채 웃고 있는 공병우의 사진이 있다. ▲ 공병우 사진
공영태 제공

한글을 입력할 수 있는 공병우의 세벌식 타자기가 있다. 한글의 자모음과 숫자를 입력할 수 있다. ▲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1952년
공영태 소장

한글 글꼴의 원형을 만든
디자이너, 최정호

한 남성이 ‘한’이라는 글자가 적힌 카드를 들고 있다.

최정호(崔正浩, 1916~1988)는 1세대 한글 글꼴 디자이너로 한평생 한글 글꼴 연구에 몰두한 장인이다. 그는 오늘날 쓰이는 디지털 한글 글꼴에 큰 영향을 끼친 분으로, 명조체, 고딕체 등 30여 종의 한글 글꼴의 원형을 만들었다. 1957년 그가 만든 첫 원도인 동아출판사체를 시작으로 일본에서 도입된 사진식자 방식의 한글 원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글 글꼴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가 제작한 글꼴은 높은 가독성과 뛰어난 완성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88년 그는 마지막 원도인 최정호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평생 애쓰고 노력한 결과물들은 한글 글꼴 디자인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최정호의 ‘최정호체 원도’가 있다. 위의 종이 상단에는 가로로 ‘람’, ‘공’, ‘무’, ‘주’가 적혀 있다. 아래에는 ‘내’, ‘부’, ‘정’, ‘검’이라고 쓰여 있다. 아래의 종이 상단에는 가로로 ‘체’, ‘첫’, ‘철’, ‘천’이라고 쓰였다. 밑에는 ‘호’, ‘형’, ‘협’, ‘현’이라고 적혔다. ▲ 최정호체 원도 1988년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 제공

김민지(연구교육과 학예연구사)

04383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 국립한글박물관
대표전화 02-2124-6200, 단체 관람 02-2124-6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