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을 지키고 있는 세종대왕 동상의 왼손에는 한글 창제 목적과 사용법이 서술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들려 있다. 이는 세종대왕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한글 창제임을 상징함과 동시에, 우리글을 읽고 쓰는 모든 지적 활동의 뿌리가 세종대왕의 가르침이란 것을 의미한다. 백성들을 위해 쉽게 배워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든 세종대왕의 정신을 기려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백성들을 위한 ‘참 스승’ 세종대왕,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도
한글 창제의 뜻을 세운 세종대왕
세계 평화와 인류 발전을 위해 교육, 과학, 문화 등의 국제 협력을 도모하는 연합기구 ‘유네스코(UNESCO)’는 문맹 퇴치에 공로가 있는 기관이나 개인을 선정해 세종대왕의 이름을 딴 국제상인 ‘세종대왕 문해상(King Sejong Literary Prize)’을 수여하고 있다. 매년 9월 8일에 시상식을 열고 상금과 상장, 그리고 세종대왕 메달을 수여한다. 누구나 글을 배워 쓸 수 있도록 ‘훈민정음’을 만들어낸 세종대왕의 업적이 유네스코를 통해 전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어려운 한자를 익히지 못해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것을 항상 안타깝게 여겼다. 실제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의 훈민정음의 서문에는 평생 글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민정신이 명확히 드러난다.
▲ 세종대왕 어진
당시에는 오직 사대부를 비롯한 지배층들이 한자를 배워 지식을 독점했기 때문에, 권력 역시 이들만의 몫이 됐다. 세종대왕은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정책을 펼쳐도 백성들이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을 가엾게 여기다가, 온 국민이 쉽게 깨우칠 수 있는 문자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1443년에 훈민정음이 탄생했지만, 대신들은 물론 최측근 세력인 집현전 학자들까지도 한글 창제에 대해 거세게 반발했다. 최만리, 정찬손 등의 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세종대왕이 “이두를 제작한 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라면, 지금의 언문(한글)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이다”라고 질타한 일화가 《세종실록》에 남아 있을 정도다. 이후 세종대왕은 여러 작업을 통해 한글을 사용해본 뒤 1446년 훈민정음을 세상에 알렸고, 정인지·안지·권제 등을 명해 조선 왕조 창업을 노래한 용비어천가를 펴냈다.
‘노비에게도 휴일을 내려라’,
백성을 진정 아낀 애민정신
당시 대신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한글을 만들어낸 것은 세종대왕이 ‘수양을 통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유학의 핵심 철학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글자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을 곁들여 펴낸 《삼강행실도》를 통해 세종대왕의 이러한 마음을 잘 엿볼 수 있다.
▲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펼쳐낸 그림책 《삼강행실도》
세종 16년에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세종대왕은 이를 몹시 안타까워하며 군신·부자·부부의 관계에 모범이 될 법한 행실을 모아 《삼강행실도》란 책을 편찬했다. 《세종실록》에 적힌 ‘어리석은 백성들이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림을 붙이고 삼강행실이라 하고….’란 구절처럼 한문을 잘 모르는 백성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할까 염려해 이야기마다 그림을 넣어 한눈에 내용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뜻을 이어받아 성종은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풀어낸 언해본(한문으로 된 내용을 한글로 풀어서 쓴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후 《삼강행실도》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전국 각지에서 간행됐는데, 한글박물관에서도 언해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박물관 누리집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밖에도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고 가르치려는 세종대왕의 덕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26년에는 관청에서 일하던 여자 노비들의 산후 휴가가 1주일인 것을 알고는 출산이 예정된 달을 포함해 출산 후 100일을 쉴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고, 1434년에는 관비의 남편에게도 산후 1개월간 쉬게 해 주었다. 또한 ‘나이 많은 사람을 존경해야 효도에 대한 풍속이 두터워진다(세종실록 17년)’며 80세 이상의 노인은 신분과 관계없이 양로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고, 90세가 된 천인에게 쌀을 하사하기도 했다.
지독한 질병과 고통 속에서도
만인의 귀감이 됐던 삶
▲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백성들이 스스로 배우고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최고의 가르침이다
‘태평성대를 이끈 성군’으로 각인된 세종대왕이지만 실상 그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세종실록》 21년에 기록된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쇠로(衰老)함이 심하다.’는 글귀가 있을 정도였다. 젊을 적에는 다리가 아파 고생했고, 중년에는 등에 종기가 나 바로 눕는 것조차 어려웠다. 피부병을 앓아 온천에 자주 방문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며, 지금의 당뇨병인 ‘소갈증’에 걸려 하루에 한 동이가 넘는 물을 마셔야만 했다.
특히, 세종대왕은 ‘활자 중독’이라 불릴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는데, 오랜 독서와 당뇨 합병증 탓에 수시로 눈병을 앓았음에도 글 읽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그 결과 44세 즈음에는 어두운 곳에서 지팡이 없이 걷기가 힘들 정도로 안질이 심해졌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세종 28년은 세종대왕이 돌아가시기 불과 4년 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한글 창제는 온갖 질병을 앓던 투병 상황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잦은 질병을 앓으면서도 밤을 새워가며 책을 놓지 않는 세종대왕의 모습에 신하들은 더욱 학문에 정진할 수밖에 없었다. ‘신하가 스승이 되어 왕을 가르치는 자리’인 경연에서도 세종대왕은 오히려 분위기를 주도하며 신하들이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중국에서 탈피한 천문관 세우고
법전까지 정비해
세종대왕은 과학기술의 요체였던 천문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천문의 현상을 정확히 파악해 백성들에게 농사를 지을 절기를 알리는 ‘관상수시(觀象授時)’ 때문이다. 조선은 이전까지 명나라의 역법을 사용했는데, 지리적 여건이 달라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일이 잦았던 까닭이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종래 중국에 의존해 왔던 관상수시를 독자적으로 수행하고자 이순지와 김담을 시켜 우리의 역서인 《칠정산내편》을 집필하게 했고, 이에 따라 한양의 해돋이, 해넘이 시간을 계산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력이 됐다.
또, 날씨를 연구하는 ‘관상감’을 두어 장영실, 이천 등에게 측우기, 혼천의, 간의, 앙부일구 등의 관측기구를 만들게 했다. 특히, 서울과 각 도의 군현에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였던 측우기를 두어 강우량을 재도록 했다.
과학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법전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태종 때 공포됐던 《경제육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해 법전에 누락된 것을 추가하고 중복, 착오가 있는 부분을 바로잡았다. 즉위 초부터 이어진 법전 편찬사업은 세종 15년 《신찬경제속육전》이 만들어지며 완료된다.
때론 부드럽고, 때론 강한
외교 안보정책으로 강건한 국가 만들어
더불어 요동치는 국제정세 속에서 외교, 안보적으로 힘써 백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15세기 초 한반도의 형세를 살펴보면 북으로는 여진, 남으로는 왜구가 창궐해 많은 백성이 약탈당했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뒤 강력한 왕조를 세운 명(明)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세종대왕은 명에 대해 사대 외교를 통해 중국의 문물과 기예를 수용하는 한편, 왜구와 여진족은 군권을 세워 강력히 대응했다.
당시 명은 고려 때부터 처녀와 금은을 조공으로 수탈해갔는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진 이후에도 처녀와 금은을 공출할 것을 요구했다. 세종대왕은 이를 분하게 여기면서도 실리를 얻어내고자 조선 땅에 사신으로 방문하던 조선 출신 환관들의 환심을 사는데 공을 들였다. 이후 조선에 대한 명의 평가가 좋아지자 세종대왕은 여러 차례 친서를 올려 처녀 진헌(進獻)과 금은 공물을 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명은 세종 12년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보내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세종대왕의 백성을 향한 마음이 외교적 결실을 맺은 것이다.
▲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광화문 광장에 전시된 혼천의
평화적으로 해결이 어려운 문제에 있어서는 강력한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와 함길도 일대를 약탈하던 여진족을 공략하고자 최윤덕을 평안도도절제사로 삼아 이들을 정벌케 하였다. 조선군은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섬멸했으며,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지역에 4군(四郡)을 설치해 국경을 안정시켰다. 이와 함께 연안지역을 약탈하던 왜구의 근거지 대마도를 정벌해 더 이상 해적들이 날뛰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세종대왕이 위대한 성군이자 가장 뛰어난 임금으로 불리는 것은 노비의 처우를 개선해 줄 정도로 모든 백성을 사랑한 어진 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분을 가리지 않고 뛰어난 자를 등용해 국사를 맡긴 실용 정신은 조선 초기 국가 체계를 세우는데 근간이 됐다. 해시계를 발명한 장영실, 경복궁을 건축한 박자청, 병선을 관장했던 윤득흥 등은 모두 천인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다. 비록 천민이라 할지라도 재주가 뛰어나고 배울 점이 있는 전문가라면 이에 걸맞은 합당한 직책을 내린 것이다. 이처럼 오직 백성에 이로운 것만을 생각하고 이를 국사 전반에 걸쳐 시행한 세종대왕은 오늘날에도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칭송되고 있다.
한글의 원형이 궁금하다면 한글박물관으로
한글박물관 1층의 한글도서관은 《훈민정음해례본》과 《훈민정음언해본》 등의 고서를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단순히 겉만 보고 지나치는 전시 방식이 아니라 직접 책장을 넘겨가며 한글 창제의 원리를 배울 수 있어 유용하다. 더불어 2층 상설전시실에서는 《두시언해》, 《삼강행실도》 등 한글로 만들어진 다양한 고문서들을 만나볼 수 있다.
‘해례본’과 ‘언해본’의 차이는?
《훈민정음》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해례본’과 ‘언해본’을 헷갈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해례본은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설명하기 위해 1446년(세종 28년) 정인지 등의 학자가 세종대왕의 명령을 받고 한문으로 편찬한 해설서이다. 국보 제70호로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언해본은 한문본 《훈민정음》의 본문인 《예의편(例義篇)》만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번역한 사람이나 번역된 연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세종 말년부터 세조 초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