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리말글 대신 일본어를 배워야 했다. 무의식중에라도 우리말을 사용하면 선생님께 혼이 나던 어린 시절의 아픔은 모국어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자라났다. 문학평론가이자 언론인, 교육자에 더해 소설, 시, 수필에 희곡까지 써내며 작가적 면모를 보이고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국립국어연구원을 발족하는 등 우리말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날을 맞아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만나 한글의 현재와 나아갈 길을 물었다.
Q.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독자들에게 간단한 인사와 최근 근황을 말씀해주세요.
국립한글박물관의 온라인 소식지 독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언론계, 대학, 그리고 사회활동까지 여러 일을 해왔습니다만, 최근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많은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지금은 마무리 작업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간 대학에서 강의하며 우리나라의 다양한 문학 작품에 대해 연구해왔습니다. 신라 향가인 <제망매가(祭亡妹歌)>와 고려가요인 <청산별곡(靑山別曲)>의 고전부터 이상 윤동주 그리고 오늘의 김승옥 《무진기행》까지 총 47개의 작품을 분석 정리해 출판하는 작업이지요. 최근에는 시력도 좋지 않아 작업 속도가 더뎌지고 있습니다. 이 작업을 조금 더 일찍 시작해야 했는데, 늦은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되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의 말년에 우리 선조들이 자연과 사람과 운명을 이야기하며 창조해온 이야기를 거듭나게 하는 것은 무척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Q. 이어령 전 장관님이 생각하는 ‘한글’은 무엇인가요?
제가 학교에 입학했던 때는 아직 일제강점기라 일본어를 배우고 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죠.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한글을 배우고 우리말을 사용하는 한글세대와는 달랐던 상황이지요. 학교에서 당시 담임선생이 매주 딱지를 10개씩 나눠줬는데, 무심결에 한국어를 사용하면 학생들끼리 서로 딱지를 뺏었습니다. 토요일에 딱지를 조사할 때 가진 것이 적으면 체벌을 받거나 변소를 청소하는 등의 벌을 받았죠. 반대로 딱지를 많이 뺏은 학생에게는 공책 등의 상을 내렸습니다. 금지된 한국말이니 당연히 한글을 쓴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어린시절 나에게 있어서 한글이란 잃어버린 문자였지요.
한국인이 한국말을 말하고 한글로 글 쓰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한글로 글을 써서 창작을 하고 있는 게 커다란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아픈 과거가 지나갔다고 해서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어둠의 시기를 뚫고 빛을 찾아온 한글의 가치를 항상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한글을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축복인가를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깊이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겁니다.
Q. 문인 중에서 컴퓨터로 처음 글을 쓰신 분으로 알려져 있고 올림픽 개회식 대본도 워드프로세서를 쓰셨는데 한글과 컴퓨터와의 관계는?
정보화 시대의 기수를 자청했었지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란 구호를 만들었습니다. 컴퓨터의 보급과 사용이 절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저는 문인으로서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데요. 당시 미국과 일본에 방문해 그곳의 학자들에게 자료를 건네 달라 했더니 플로피 디스켓에 담아서 주더군요. 우리는 아직 필기해놓은 노트를 주고받던 시절이니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 컴퓨터를 구입해 ‘MS-DOS’의 매뉴얼을 놓고 독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주변에 문인을 만날 때마다 컴퓨터를 사용하라고 설득하고 나섰습니다.
외국은 이미 기계화를 마쳤는데, 우리나라는 대부분 손으로 수작업하니 컴퓨터로 한 시간이면 마칠 작업을 몇 배의 시간을 들여야만 했죠. 그래서 “컴퓨터는 진시황의 불로초다.”라는 농담까지 하며 문인들에게 컴퓨터를 전파했습니다. 1년 걸려서 할 작업을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데, 컴퓨터가 곧 장수하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한글과 컴퓨터는 다른 어느 문자보다도 궁합이 잘 맞습니다. 왼쪽 자판기는 자음 오른쪽에는 모음, 키보드를 칠 때 두 손이 조화를 이룹니다.
Q. 컴퓨터 등 IT 기기 사용이 일상화된 뒤 ‘한글 파괴’라는 새로운 문제도 대두됐는데요.
요즘에는 ‘ㅋㅋㅋ’, ‘ㅎㅎㅎ’, ‘ㅠㅠ’ 등 한글의 자음이나 모음만을 활용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대중화됐지요. 사실 이러한 특성은 자음이나 모음만으로도 분리해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어준 세종대왕께 감사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남들이 아이콘 문자를 사용할 때 우리는 우리 글자를 갖고 마치 상형문자처럼 울고 웃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니까요. 한글의 뛰어난 감정표현력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가령 글자가 지니는 딱딱한 특성도 ‘ㅇ’을 붙여 순화시키는데, ‘네’를 ‘넹’으로, ‘하세요’를 ‘하세용’으로 표현하면 훨씬 부드러워지죠. 이와 같이 응용해나간다면 한글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표현법이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과하면 좋지 못하듯 한글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자음이나 모음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하고, 과도하게 말을 줄이는 조어의 사용도 삼가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보고 동의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해야지, 몇몇 사람 혹은 특정 그룹 안에서만 통하는 암호화된 글은 ‘시민권을 얻지 못한 혼란을 초래하는 글’일 뿐입니다. IT 기기가 대중화되며 한글이 변화하고 발전해나가는 양상은 바람직하지만, 한글의 기본 틀을 지키면서 변화를 꾀해야 할 것입니다.
Q. 한글날은 과거 기념일로 바뀌면서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된 바 있습니다. 우리가 한글날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990년 당시 우리 사회는 지금처럼 휴일을 경제 선순환의 연결고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더욱 열심히 일해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10월에는 휴일이 많아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 지적됐죠. 급기야 개천절, 제헌절 등 국가기념일을 제외한 국군의 날, 한글날, 식목일 등을 공휴일에서 제외하자는 정책이 나온 것입니다. 그간 한글날을 기념일로 격하시켰다는 오해를 많이 받아왔습니다만, 특별히 한글날만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지요. 군인 출신 대통령이 국군의 날조차 휴일에서 제외한다는데 한글날만을 예외로 하기는 역부족이었어요.
하지만 일제강점기 내내 탄압받았던 한글이 또다시 홀대받는다는 안타까운 마음에 장관직을 걸고 맞서 싸웠습니다. 결국 그 타협점에서 설립된 것이 바로 문화부에 국립국어원의 전신인 국립국어연구원 설치령을 확보하게 된 것이죠. 우리말과 한글을 연구하는 국립 전문기관을 세우고 한글학자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한글의 위상을 지키는 최선의 방안이라 생각했습니다.
현재는 한글날이 국경일이자 공휴일로 다시금 지정돼 제자리를 되찾았습니다. 물론 기념일이 아니더라도 한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한글날의 본질이겠지만, 공휴일로 지정돼 쉬게 된 것은 더욱 제자리를 찾게 된 일입니다. 아이들이 엄마하고 한글날에 놀았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교육 효과를 발휘하게 되니까요.
Q. 한글만이 지닌 특성은 어떤 것일까요?
▲ ‘아리랑 우리랑’에 대해 설명하는 이어령 전 장관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 중 우리처럼 독창적인 글자를 사용하는 곳은 없습니다. 유럽도 알파벳문화권은 모두가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을 변용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일본의 가타가나역시 한자를 응용하여 그 일부를 떼어내서 만든 것이죠. ア는 ‘阿’에서 イ는 ‘伊’에서 가져온 거죠. 그런데 한글은 한국말만이 아니라 인간의 발성기관에서 나는 소리의 형상을 적은 것으로 훈민정음은 세계인의 정음이 될 수 있지요. 한마디로 글로벌 문자 시스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문자 자체를 가지고 사고할 수 있는 도구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남’에서 점 하나 빼면 ‘님’이 되지요. ‘님이 남이 되고 남이 님이 되는 과정’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을까요. ‘나’와 ‘너’는 어떻습니까. 나는 양성모음, 너는 음성모음인데 똑같은 단음절에 모음이 뒤집힌 형태입니다. 반면 영어로 표현해 봤을 때 ‘You’와 ‘I’, ‘water’와 ‘fire’는 어떤 유사와 대비 관계도 찾아볼 수 없지요. 물과 불도 ‘ㅁ’과 ‘ㅂ’, ‘m’과 ‘p’음 하나의 차이로 음양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어요. 이런 형태적인 특징이 우리의 사고를 풍부하게 해주고 이른바 ‘문자사고’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착안해 ‘아리랑 우리랑’이라는 행사를 만들어 개최할 때 이쪽에서 읽으면 ‘아리랑’이고, 저쪽에서 읽으면 ‘우리랑’이 되는 특이한 로고를 만들 수 있었지요. 세상에 이런 글자가 어디에 또 있을까요.
Q. 한글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요?
▲ ‘안상수체’를 사용한
문화부 문서
한글은 우수한 문자이지만 변별적 특성이 약해 오자의 발생률이 높은 약점도 있습니다. 세종대왕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면 그때 한글을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보다 쓰기 편하고 창조적인 글꼴로 새롭게 개선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자나 일본의 가타카나와 마찬가지로 한글 역시 일정한 네모꼴 안에 문자가 갇혀있기 때문이지요. 획일적인 공간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글의 문자모양이 다양해야 사고도 유연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영어에는 대문자, 소문자 그리고 인쇄체와 필기체가 있지요. 그런데 우리 한글은 오로지 하나의 기본적인 글씨체로 고정되어 있어요. ‘가’자는 어느 경우에도 그 모양이 달라지지 않지만, 알파벳 A는 대문자 소문자 필기체에 따라서 여러 모양으로 바뀝니다. 특히 우리의 경우 관료사회에서는 명조체를 많이 씁니다. 초등학교부터 공공기관에서 명조체를 사용했기 때문에 국어 정책을 다루는 문화부만이라도 안상수체로 바꾸어 네모꼴의 획일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했지요. 문화부에서 사용하는 로고를 비롯해 모든 문서에서도 안상수체를 사용해서 한글의 다양한 모습을 알리려고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