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2017. 10.

한글이 한국어 아니야?, 문자와 언어의 차이, 연규동 연세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연구교수

외국 영화의 영상 매체를 구입해서 재생했는데, 외국어 대사가 아래 사진과 같이 표기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기대했던 자막은 어떤 쪽이었을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오른쪽 사진일 것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중 한 장면

영화 「인사이드 아웃」 중 한 장면

▲ 영화 「인사이드 아웃」

문자와 언어를 혼동하지 않으려면 한글과 한국어의 차이 알아야

해외의 영상물이나 도서, 게임 등을 국내에 수입하면서, 그 매체에 사용된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글화’라고 하거나 그 작품 등을 보고 ‘한글판’ 또는 ‘한글 패치’라 부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위 사진에서 왼쪽이나 오른쪽이나 모두 ‘한글화’되었는데, 왜 왼쪽 사진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 사례를 통해서 ‘한글화, 한글판’ 등의 표현이 적절하지 않으며, ‘한국어화, 한국어판’이 더 합리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래 만화에서도 ‘한글’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모두 한국어로 바꾸어야 한다.

▲ 웹툰 「비빔툰」 중

▲ 웹툰 「낢이 사는 이야기」 중

우리는 흔히 ‘문자’와 ‘언어’를 혼동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한글’과 ‘한국어’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한글(훈민정음)은 15세기에 세종대왕이 만든 문자 체계이며, 한국어는 한국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이미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는 한국어를 사용해 왔다. 그 전에는 한국어를 적을 문자가 없었기에 외래 문자인 한자를 빌려서 사용해 왔지만, 한글이 탄생한 덕분에 한국어를 더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해마다 한글날이 되면 맞춤법에 어긋난 글이나 줄임말, 신조어 사용을 거론하면서 언론에서는 “한글이 파괴되고 있다”라고 비판하지만, 사실 여기에서 굳이 문제를 삼아야 한다면 ‘한글’이 아니라 ‘한국어’이다. 또한 순우리말 대신에 한자어, 외래어, 외국어를 많이 사용하는 경우를 보고 “세종대왕이 슬퍼하실 것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세종대왕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다지 적확한 표현은 아니다.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최적화된 문자, 한글

한국어는 다음과 같이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로도 표기될 수도 있다.

Nanun nerul saranghae.
那恩 尼乙 四娘海.
ナヌン ニル サランヘ.

위에 나열한 여러 문장은 각각 라틴 문자, 한자, 일본 문자로 표기되었지만, 모두 한국어를 적은 것이다. 혹시 이 문장들이 한국어를 적은 것이 아니라, 각각 영어 · 중국어 · 일본어를 적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 보면 모두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한국어를 나름대로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발음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이는 이 문자들이 한글만큼 한국어의 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없기 때문일 뿐이다. 즉,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는 문자이다.

한글로 다른 언어를 표기할 수도 있다

한국어가 여러 가지 문자로 표기될 수 있듯이, 다른 언어도 한글로 표기될 수 있다. 다음 문장들은 모두 한글로 표기되어 있지만, 각각 영어 · 중국어 · 일본어를 적은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한글로 표기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으면 해당 외국어 화자들은 어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다른 문자가 한국어의 소리를 정확하게 적지 못했듯이, 한글도 해당 외국어의 소리를 100% 정확하게 적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 러브 유.
워 아이 니.
아나타오 아이시테루.

▲ 여러 문자로 적힌 한국어 지명

▲ 여러 문자로 적힌 일본어 지명

한글이라는 문자로 한국어를 어떻게 표기할지를 규정한 것이 ‘한글 맞춤법’이며, 라틴 문자(로마자)로 한국어를 어떻게 표기할지를 규정한 것이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다. 이 두 가지 어문 규정은 문자만 다를 뿐 모두 한국어를 적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또한 ‘외래어 표기법’은 외래어 또는 외국어를 한글이라는 문자로 표기하는 방법을 다루는 어문 규정이다.

‘ㄱ’을 ‘기역’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 측면에서 부르는 것이다. 언어라는 관점에서는 ‘ㄱ’는 소릿값 ‘그’로 읽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a’는 문자라는 관점에서는 ‘에이’이며, 언어라는 관점에서는 소릿값 ‘아’가 되는 것이다. 언어마다 발음은 비슷해도 문자의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다. 라틴 문자 ‘y’의 이름은 영어권에서는 ‘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독일어권에서는 ‘입실론’이라고 하며 프랑스어권에서는 ‘이그렉’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문자와 언어가 뒤섞여 사용되는 경우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혼동이 일어나는 까닭은 언어생활에서 문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이다. 요즘처럼 많은 의사소통이 직접적인 ‘언어’ 교환뿐만 아니라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 ‘문자’ 교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에 문자와 언어는 더욱 가깝게 관련을 맺는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글을 사랑하는 것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어를 사랑하고 한글에 자부심을 느낄수록, 한국어와 한글 또는 언어와 문자를 혼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연규동

연규동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근대 한국어의 어휘집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문자의 일반 이론 및 알타이어학, 한국어 역사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역서로는 《통일시대를 위한 한글 맞춤법》, 《A Description in Najkhin Nanai》, 《문자의 발달》, 《문자의 언어학》, 《말한다는 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