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제58호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글 나누기 2

세종,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내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다!

글. 박현모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세종시대 결정적 시기 3년

“세종실록 중 꼭 읽어봐야 할 책을 꼽으라면 어떤 것일까요?”

세종실록을 강독하는 중에 어떤 분이 한 질문이다. 열아홉 권이나 되는 국역 세종실록을 다 읽기는 힘든 상황에서, 그래도 필독해야 할 책을 몇 권 선정해 달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국역본 16권과 17권을 꼽았다. 이 두 권의 책에는 1443년(세종 25년) 1월부터 1446년(세종 28년) 6월까지의 실록 연대기(chronicle)가 실려 있는데, 훈민정음의 창제(25년 12월)와 반포(28년 9월), 세제개혁안의 최종 확정(26년 11월), 계해약조 체결(25년 6월) 등 세종시대 최고의 업적들이 이 시기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세종 재위 중 결정적 시기(1443년~1446년), 1443년(제위 25년), 1월 고약해 순직, 2월 변효문 등 일본 통신사 출발하여 10월 귀국(서장관 신숙주), 3월 왕과 왕비 온양온천행(4월 6일 환궁), 4월 남수문 과로사(4월 10일 과로사 보상책 마련), 세자에게 대리청정 지시, 6월 조일관계 재정비(계해약조), 7월 가뭄 때 하늘제사 논쟁, 9월 함길도 대규모 사망자 발생(1,600여 명), 11월 토지 등급 정하기 위해 경차관 20인 하심도 파견, 전제상정소 설치, 12월 훈민정음 창제,1444년(제위 26년), 1월 평원대군(7남) 사망, 2월 진양대군 개칭(수양대군으로), 최만리 등 훈민장음 창제 반대 상소, 3월 권제 등 용비어천가 10권 편찬, 윤7월 2차 초수리 행차(윤7월~9월), 10월 집현전, 오례의주 상정, 11월 전분6등 연분9등 공법 확정, 11월 역대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사고에 분장, 12월 치평요람 완성, 정인지 전문, 세종실록 27/3/30, 제가역상집 완성, 이순지 발문, 세종실록 27/3/30, 광평대군(5남) 사망), 1446년(제위 28년) 3월 소헌왕후 심씨 사망(1395~1446), 7월 수양대군, 석보상절 편찬(다음 해 7월 완성), 9월 훈민정음 반포, 같은 해 11월 연문청 만들고 12월 이과 시험과목에 훈민정음 추가

▲ 세종 재위 중 결정적 시기(1443년~1446년)

하지만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이 시기는 성취의 때만은 아니었다. 이미 성년이 된 두 아들 광평대군(26년 12월)과 평원대군(27년 1월)이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그 충격으로 왕비마저 1년 뒤인 1446년 3월에 세상을 떴다. 잇따르는 가족의 죽음에 직면한 세종은 ‘지존(至尊)의 임금으로서도 가족의 비극에 대해서는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한다’며 인간의 무기력함을 호소했다.

이 시기는 또한 전국적으로 떼도둑이 극성을 부리던 치안의 혼란기였다. 떼도둑 40여 명이 밤중에 말을 타고 양반집을 포위하고 칼로 위협해 재산을 약탈해 가는가 하면(황해도 토산), 백성들은 도둑이 소를 훔쳐가는 것을 알면서도 “후환이 염려되어 아무 소리도 못하고, 관가에 신고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충청도 충주)(세종실록 26년 10월 9일). 이는 떼도둑이 연이은 가뭄으로 농사를 망친 농민들을 끌어들여 무리에 가입시킨 것 때문이라는 게 조정의 판단이었지만, 군대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그 피해는 심각했다.

결정적으로 이 시기에 세종을 힘들게 한 것은 그의 건강문제였다. “옛사람들은 친구가 죽거나 눈이 어두우면 통곡한다고 하였다. 내 눈동자를 가리는 막이 있어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다”는 1442년 8월의 한탄처럼, 당시 그는 거의 장님 수준이었다. 왕비와 함께 온양온천에 가고(25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청주에 행차해 눈병 치료를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세종실록 16권과 17권은 세종의 그런 보람과 고민들이 배어 있는 책이다. 그런데 책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은 세종의 청주 초수리 행행 부분이다. 1444년(세종 26년) 2월 29일 아침 일찍 경복궁을 출발해 나흘 뒤인 3월 2일에 초수리에 도착하기까지 국왕의 동선(動線)을 현대 지도를 들고 따라가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곳에 두 차례나 가서 세종이 한 일을 살펴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비밀 프로젝트 워크숍 개최지 청주 초수리

세종 일행이 그곳에서 했던 일 중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중요한 과제는 제1차 행행 기간(3월 2일~5월 2일)에 수행한 훈민정음 막바지 작업이다. 초수리 행행과 훈민정음을 연계시켜 지적한 것은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인데, 최만리는 유명한 언문창제 반대상소에서 “이번 청주 초수리 거둥 때 (…)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꼭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닌데, 어찌 이것을 행궁(行在)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옥체 조섭을 번거롭게 만드십니까?”라고 비판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초수리로 출발한 때(1444년 2월 29일)는 정음 창제 사실이 알려진 지(1443년 12월 30일) 두 달이 지난 때였고, ≪운회≫를 번역하도록 지시한(1444년 2월 16일) 13일 후였다. 그때는 또한 신숙주·성삼문 등을 요동으로 보내 해외 학자의 자문을 구하기(1445년 1월 7일) 11개월 전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초수리 행차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그것을 언어학적으로 실험하고 고증을 거치며, 시행방안을 궁구하는 시기에 놓여있었다. 문자 창제에 깊숙이 관여한 정인지가 삼도(충청·경상·전라) 도순찰사로 그곳에 와서 합류한 것도 그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서울에서 290여 리 떨어진 청주 초수리(초정)까지 와서, 신병 치료는 제쳐놓고 새로 개발한 엄청난 창조성과(훈민정음) 마무리에 몰입하는 세종을 보면 일중독 리더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야트막한 야산과 논밭 사이의 행궁 주변에 둘러앉아서 낮밤을 잊고 소명 완성을 위해 막판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게 세종실록 16권이다.


구분 행차 기간(왕복 날짜 포함) 초수리에 머문 기간
1차 행차 68일(2월 29일~5월 7일) 60일(3월 2일~5월 2일)
2차 행차 68일간(윤7월 15일~9월 26일) 61일(윤7월 18일~9월 21일)
합계 136일 121일
▲ 1444년 세종의 초수리 행차 기간

세종의 초수리 행차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곳에서 세종이 자신의 비전을 가장 상세히 알렸기 때문이다. 세종은 그해(1444년) 재차 초수리에 행차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국정철학을 정리하듯이 ‘정치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상세히 말했다.

 

세종의 정치비전 ‘생생지락’의 뜻

국역본으로 원고지 26매에 이르는 긴 교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①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농사짓는 일은 입고 먹는 것의 근원으로서 왕의 정치에서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것이다. ② 오직 그 일만은 백성 살리는 소명에 관계된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지극한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왕을 섬기는 것이다. ③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지도하고 이끌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이 부지런히 농사에 힘써 생생지락(生生之樂)할 수 있겠는가.”(세종실록 26년 윤7월 25일, 일련번호는 필자가 매긴 것)

여기서 세종이 말하는 메시지는 세 가지다. 첫째,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것, 따라서 백성을 먹여 살리지 못한 수령과 왕은 자격이 없다는 게 세종의 신념이었다. 농사로 표현되는 민생문제 해결이 국가경영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세종은 여러 차례 역설했다.

둘째, 국가와 정치의 존립 이유이다. 세종에 따르면 천하 사람들이 힘들게 농사지어서 나라에 세금 바쳐 왕을 섬기는 것은 바로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필요에 의해 국가와 정치가 생겨났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임금도 없고 관리도 없었으며 백성들끼리 살다가, 어떤 일을 해보려고 하였으나 지도자가 없어서 혼란스러워졌고, 따라서 지도자를 추대하여 다스리게 했다”는(세종실록 13년 6월 20일) 세종의 ‘국왕 추대설’은 지금 보아도 놀라운 파천황(破天荒)의 선언이었다.

셋째, 따라서 백성들로 하여금 생생지락의 세상, 즉 각자 삶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생활하며 살 수 있도록 수령 등 ‘위에 있는 사람들’이 성심(誠心)으로 한발 앞서 이끌고[迪] 솔선수범해야[率] 한다는 세종의 당부이다. 생생지락이란 말은 ≪서경≫에 나오는 말로, ‘너희 만민들로 하여금 생업에 종사하며 즐겁게 살아가게 만들지 않으면 내가 죽어서 꾸짖음을 들을 것이다’라는 중국 상나라의 군주 반경의 말에서 유래했다. 세종은 역대 국왕 중에서 “생생지락”이란 말을 가장 많이 언급한 왕으로(전체 16회 중 8회 언급), 수령을 지방에 내려 보낼 때마다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살면서 생업에 재미를 붙이게 하라”고 하여, 비전(생생지락)의 실현을 위해 함께 노력해 주길 당부하곤 했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내며 새 봄을 기다리다

재위 26년 이후의 시기는 ‘세종 정치의 겨울’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시력이 심각히 악화되었다. 또한 최만리 등의 반대, 사서 언해 지시 무시 등 관료들의 저항에 계속 시달렸다. 연이은 흉년, 관료제 기강해이, 집단 강도 출몰, 잘못된 인선(人選) 등 내우(內憂)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 두 아들과 아내의 잇따른 사망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세종[聖心無聊]은 의지처가 없어 결국 종교에 귀의한 듯하다. 내불당 건립 과정에서 세종은 거의 모든 신료들과의 대결 구도에서 심한 고립감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재위 말년에는 몽골의 명 침입으로 인해 명으로부터 10만 정병 파견요청이 들이닥쳐, 전국의 동원 가능 병력을 확인해야 했다. 몽골 정벌에 나갔던 명의 영통제가 사로잡히고 새 황제가 등극하는 가운데 외교난제로 세종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이 시기의 세종실록을 읽을 때면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한 대목이 떠오른다. 옛적에 벌거벗은, 집도 불도 모르는 야만인의 한 무리가 열대지방의 따뜻한 고향을 떠나서, 북쪽으로 향했는데, 밤 추위가 시작되자 일부는 걸음을 돌려 다시 남쪽으로 돌아갔고, 헤매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던 사람들 중 소수의 무리가 살을 에는 듯한 찬 공기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인간능력의 가장 고귀한 부분” 즉 발명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들 소수는 “처음에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문명을 향한 위대한 전진을 하게 되었다”는 토인비의 말에서 세종 정치의 겨울을 연상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 때문이었다.

만약 세종이 자신의 건강 악화와 가족의 불행에 좌절하고, 내우외환에 힘들어 하며 3년(1444년~1446년)에 걸친 ≪훈민정음 해례본≫ 제작을 그만 두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왕의 죽음과 함께 어렵게 창제한 훈민정음도 역사 속에 묻혀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제아무리 중요한 국가사업도 그 일을 주장하고 추진하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최고 권력자의 교체와 함께 무산된 경우가 역사에는 수없이 많다. 말하자면 세종의 문자 창제 프로젝트는 최만리, 정창손, 김문 등 언문창제를 대놓고 반대했던 유교 지식인들까지 납득시키기 전까지는 완수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최만리는 안타깝게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지 못하고, 정음창제 반대상소를 올린 그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세종이 유교 철학의 핵심인 ‘음양오행의 원리’에 입각해 삼단논법으로 정음의 우수성을 설파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를 보면 세종은 ① 우주를 관통하는 유일한 원리는 음양오행으로서, ②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것 치고 이 원리를 벗어난 것은 없는데, 인간의 목소리 역시 음양오행의 원리를 담고 있다. ③ 따라서 인간의 목소리가 나는 곳, 즉 음성 구조를 본 따서 만든 훈민정음은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치, 즉 음양오행의 이치에 부합된다는 삼단 논법을 구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보편 명제를 제시한 다음, 거기서 파생된 자연스런 연결고리를 끌어내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도출해낸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뒤에 유교 지식인들은 비로소 ‘아, 훈민정음이라는 문자체계가 오랑캐들이나 사용하는 조잡한 문자가 아니라, 유교철학의 핵심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고도의 문자체계구나’라고 인정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세종이 참아 내기 힘든 최악의 역경을 참아내며, 자기 소명의 마무리 작업을 하는 창조적 응전의 기록을 올 여름 일독하시길 권장한다.

 

박현모 여주대학교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1999년 <정조의 성왕론과 경장정책>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원 상임연구원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쳤다. 현재에는 세종, 정조 등 국왕 리더십 시민강좌 <실록학교>를 운영 중에 있다. 저서로는 ≪정조 사후 63년≫, ≪세종처럼≫, ≪정치가 정조≫ 등 2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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