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제65호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한글 나누기 1

우리말을 지킨 독립운동가
정세권

글.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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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지키는 데 남녀노소, 학자냐 비학자냐의 구분은 불필요하다. 그 사례를 들어보자. 일제 강점기에 국어학자가 아닌 인사들이 우리 말글을 소중히 지키기 위해서 ≪조선어사전≫ 편찬을 후원하였다. 이들은 이 일로 인해 일제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이우식·김양수·장현식·김도연·이인·서민호·신현모·김종철·민영욱·임혁규가 여기에 해당한다. 또 한 분으로 정세권(鄭世權, 1888~1965)이 있다.

정세권은 국어학자는 아니었으나,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는 조선어 학회의 조선어 학자들에게 회관을 기꺼이 내주어, 이 사업을 마치게 해 주었다. 회관 제공 때문에 그는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 학회 사건’에 관련되어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막대한 재산을 빼앗겼다. 끝내 일제는 그의 기업까지 파탄시켰다. 이처럼 정세권은 식민지 시기에 우리말과 한글을 지킨 결과,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정세권은 1888년 4월 10일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필석(鄭必晳), 어머니는 이궁지(李宮旨)로 가난한 집에서 장남으로 성장하였다. 본관은 진주(晋州)였다. 다섯 살부터 마을의 서당에 다녔다. 1899년(12세)에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하였다. 1907년(20세)에 서당을 바꾸어 신식 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21세) 8월 20일에 진주 낙육(樂育)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성적이 뛰어나 상급 학년으로 수차례 건너뛰어 같은 해 12월 30일, 1년도 되지 않아 졸업하였다.

정세권 선생(1888~1965)▲ 정세권 선생(1888~1965)

 

1910년(23세) 2월 19일 고성군 군수가 정세권을 하이면 면장으로 임명하였다. 면장 재직 시절에 방풍림을 조성하였고, 뽕잎을 따러 다니고 누에 기르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전국 우수 면장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12년(25세) 8월 15일에 세금 수탈 등 면민들을 괴롭히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면장직에 회의가 들어 사직하였다.

1919년(32세)에 상경하였다.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에 가담하였고, 진주에서 일어난 3·1운동에도 참가하였다. 1년 동안 준비한 뒤에 1920년부터 집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고향 하이면의 초가집을 모두 없애고 기와집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졌었는데, 서울에서 개량 한옥을 지어 꿈을 이루어 내었다. 1920년(33세)에 개량 한옥을 짓는 건설 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하여, 1943년(56세)까지 서울 시내에 가옥 수천 채를 건축하였다. 정세권은 건축업에서 얻은 이익을 민족 운동에 쏟아부어 민족 운동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다. 기업 경영을 통해 번 돈을 민족 국가 회복에 쓴 자본가를 ‘민족 자본가’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정세권도 여기에 해당하였다.

정세권은 일제 강점기 최대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조선 물산 장려 운동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조선 물산 장려회는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조선 물산 장려 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광범위한 민족주의 운동이었고,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이었다. 1929년에서 1932년까지 조선 물산 장려회에서 상무 이사를 맡아 진두지휘하였던 대표적인 물산 장려 운동가였다. 1932년에 장산 농업 실습장(무의탁 소년 실습 수련장)을 서울 뚝섬(현 성동구) 자양동에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정세권이 조선어 학회의 언어 독립 투쟁을 후원하게 된 계기는 이극로와의 운명적인 만남에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1929년 조선 물산 장려회 회의에서 만났다. 1929년 12월 3일에 조선 물산 장려회가 주최한 조선 물산 선전 대강연회에서 이극로가 ‘주의선전-자작자급의 본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이극로는 “우리 민족은 말과 글이 오래전부터 있지만 통일되지 못하였고 사전이 없으니 나는 이 점을 깊이 느끼어 말과 글을 통일하여 사전 완성을 일생의 사업으로 하겠소.”라고 말하였다. 이극로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통일하여 ≪조선어사전≫을 완성하겠다고 자신의 포부를 밝혔던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이 이극로의 말을 들었다. 바로 그 자리에 정세권도 있었다. 이극로의 말을 들은 지 몇 달 뒤, 정세권은 수표정 조선교육협회의 방 한 칸에서 사전 편찬원들이 계속해서 모여 작업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들의 모임이 10여 년 지속됨을 지켜보았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정세권은 조선어 학회의 한글 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정세권은 1933년에 조선어 학회가 확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지지하였다. 조선어 학회는 표준어 사정(査定)을 위한 독회(讀會)를 운영하였는데, 1935년 1월 온양온천에서 제1독회를 열었다.

현충사 참배를 마친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들<br>앞줄 왼쪽 첫 번째가 정세권(1935년 1월 6일 촬영▲ 현충사 참배를 마친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들
앞줄 왼쪽 첫 번째가 정세권(1935년 1월 6일 촬영)

 

제1독회의 비용은 정세권이 모두 내었다. 1935년에서 1936년까지 조선어 학회가 추진한 표준어 사정 위원회가 개최될 때에 정세권은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정세권은 1935년 3월 이극로가 조직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그는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이극로가 추진한 학술 연구 기관인 양사원의 건립에 참여하였다. 양사원은 조선기념도서출판관과 함께 조선어 학회의 자매 기관이었다. 정세권은 양사원 건립에 도움을 주고자, 서울 가회동에 있는 큰 집 한 채를 내놓았다. 1939년 고향의 하이면 덕명리에 소재한 덕명간이학교 신축 비용을 베풀어서 같은 해 6월 15일에 개교하게 하였다.

한편 정세권은 이극로로부터 조선어 학회 회관이 없다는 말을 듣고, 회관 부지로 종로구 화동 129번지 1호 소재의 대지 32평을 샀다. 지금 시가로 땅값만 계산해도 12억 8천만 원에 달한다. 여기에 2층 양옥 건물이 세워지고 1935년 7월 11일에 조선어 학회가 입주하였다. 1층은 조선어 학회 간사장 이극로가 살림집으로 사용하였고 2층은 조선어 학회 사무실 겸 사전 편찬실로 사용하였다.

이극로 선생(1893∼1978)▲ 이극로 선생(1893∼1978)

 

정세권이 제공한 회관에서 조선어 학회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 작업을 완수하여 1936년 한글날에 발표하였다. 동시에 ≪조선어대사전≫ 편찬 사업을 지속하여 16만 개에 달하는 우리말 어휘의 뜻풀이를 완료하였고 대동출판사에 넘겨 1942년 조판까지 마쳤다. 그러자 일제는 언어 독립 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조선어 학회를 탄압한 사건을 일으켰다. 바로 1942년 10월 1일에 일어난 조선어 학회 사건이다. 정세권 역시 조선어 학회에 건물을 기증한 점,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이사로 활동한 점, 양사원 건립에 참여한 점, 그리고 조선어 표준말 사정 위원회에 후원을 한 점 때문에 홍원경찰서에 끌려가 일제 경찰에게 곤욕을 당했다.

정세권은 1942년 11월 홍원경찰서에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15일 만에 풀려났다. 일제 형사들은 “왜 하필이면 화동에 조선어 학회 가옥을 지었소?”라고 정세권에게 계속 심문하였다. 이후에도 정세권은 지속적으로 경찰에 불려 다녔다. 일제 말기 정세권이 일본 집을 짓지 않자, 일제는 “왜 한옥만 짓느냐? 일본 집을 지어라.”라고 강요하였다. 정세권은 이에 따르지 않고 끝까지 한옥만 지었다.

급기야 일제는 정세권을 탄압하고자 경제 사범으로 몰아, 1943년 6월 18일부터 7월 6일까지 19일 동안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아들 정균식과 함께 구속하였다. 구속 기간에 일본 경찰은 조선어 학회 사건(특히 정세권의 양사원 관련 경위)을 문제 삼아, 이를 묵인하는 조건으로 서울 성동구 자양동(뚝섬) 일대의 토지 35,279평을 대화숙에 바치라고 강요하였다. 즉 조선 총독부 산하 보호 관찰소가 사건을 조작하여, 정세권의 무의탁 소년 실습 수련장과 그 부대 농지 35,000여 평을 6월 23일부로 강제로 빼앗고, 경성 대화숙으로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이처럼 언어 독립 투쟁 후원을 빌미로 일제는 정세권이 일평생 동안 번 막대한 재산을 강탈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일제는 정세권의 건축 면허증까지 박탈하였는데 이후 정세권의 사업은 기울기 시작하였고 끝내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정세권은 이극로가 함흥형무소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을 뒷바라지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정세권의 민족 운동 참여, 특히 조선어 학회에 회관을 기증하여 우리말을 지킨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민국의 관광 명소가 된 북촌 한옥 마을을 가게 되면, 나라를 잃은 시기에 개량 한옥을 지어 우리 문화를 지키고, 조선어 학회에 회관을 제공하여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킨 애국지사 정세권의 발자취를 확인하기 바란다.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박용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박용규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근대사를 전공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이극로 평전≫(2005),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2012), ≪조선어학회 33인≫(201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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