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 수많은 글자가 있지만 한글처럼 그것이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으며, 제자원리가 어떠한지 정확히 밝혀진 문자는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알려 주는 책이 바로 세종 28년, 훈민정음 28자를 풀이하여 펴낸 책《훈민정음》(국보 제70호)이다.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히고 자음자와 모음자의 음가와 운용 방법을 설명하고 해설한 그 책이 없었다면, 오늘날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손꼽히는 우리 한글에 대한 정보는 훨씬 빈약했을 것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된 책인《훈민정음》(국보 제70호)을 발굴해서 후대에 전한 사람이 바로 간송 전형필이다. 전형필은 1906년 7월 26일, 서울 종로의 손꼽히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나고 4년 후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했다. 따라서 그는 일제 강점 치하에서 분노와 절망의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다.
전형필이 휘문 고보를 거쳐 와세다 대학을 나왔을 때, 그의 주변에는 조부모에 이어 아버지, 작은아버지, 맏형까지 다 세상을 등져 피붙이는 어머니만 남게 되었다. 전형필이 젊은 나이임에도 1년에 10만 석을 거둬들이는 어마어마한 재산가 된 이유가 그것이다. 그때 전형필은 자기 운명의 방향타가 되어 준 큰 스승 오세창을 만난다. 서화의 대가이자 고증학에 뛰어난 학자인 오세창은 당시 우리나라 서화계의 정신적 지주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훌륭한 우리 문화재가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오세창에게 감화를 받은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전형필은 오세창에게서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또한 고증학을 익혔고 옛 서화와 골동품을 보는 눈을 길렀다. 이는 우리 문화재의 지킴이가 되겠다는 뜻을 세운 전형필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공부였다. 어려서부터 돈에 대해 엄격한 교육을 받은 전형필은 그때까지 집안이 부유하다고 해서 돈을 함부로 쓰는 일이 없었다. 돈깨나 만지는 사람들이 술집에서 돈을 뿌리는 것을 남자의 호기로 여기던 시절에 전형필 집안 어른들은 돈을 써야 할 곳에는 아까워하지 않되, 허튼 곳에는 한 푼도 쓰지 않음으로써 큰 재산을 경영하는 사람의 자세를 몸소 보여 주었던 것이다.
전형필은 본격적으로 가치 있는 우리 문화재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골동품을 거래할 때는 무엇보다도 믿을 만한 거간을 만나는 것이 중요했다. 그때 오세창은 전형필에게 이순황이라는 믿을 만한 젊은이를 소개했다. 정직하고 성실하며 무엇보다도 옛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던 이순황은 그날 이후 전형필 곁에서 그의 손발처럼 움직여 주었다. 전형필은 인사동에 한남서림이라는 책방을 내고 이순황에게 그 운영을 맡겼다. 그곳을 통해 전형필은 수많은 문화재를 수집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와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등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모두 이곳을 통해 사들였다. 또한 수많은 귀중한 고서적들도 손에 넣었다.
전형필은 골동품의 금액을 깎으려 애쓰지 않았다. 상대가 물건의 가치를 잘 몰라서 싼값을 부르는 경우에도 늘 제값을 쳐서 건네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다투어 전형필에게 물건을 가져왔고, 그것이 그가 수많은 일급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전형필은 손에 들어온 귀중한 옛 글씨나 그림, 서적을 오세창에게 보여 감정을 받기도 했다. 그의 뒤에 당대 최고의 감식안을 지닌 오세창이 있다는 것은 든든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전형필은 일본인 손에 넘어간 조선 시대 풍속화의 대가인 혜원 신윤복의 화첩인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을 되찾기 위해 몇 년의 공을 들였고,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 제294호)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골동품 경매에서 일본에서 건너온 골동상인과 피 말리는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천 원이면 웬만한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던 시기에 2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일본인 골동 상인에게서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을 사들이기도 했는데, 이후 한 일본인 부호가 두 배의 값으로 그것을 사겠다고 제안했으나 전형필은 점잖게 거절했다.
그 무렵 일본에 정착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는 고려자기 수집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의 수집품을 몽땅 넘겨받는 기회를 맞이한 전형필은 급하게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일부 처분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그런 전형필을 보며 사기그릇 따위를 사기 위해 기름진 땅을 파는 미친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전형필에게는 골동품을 사들이는 일이 개인적인 만족을 위한 사치스러운 취미가 아니었다. 민족 문화재를 수집하는 일로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달래던 그에게는 그것은 나름의 항일 투쟁이었다.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재 중에 손꼽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훈민정음》이다. 1943년 어느 여름날, 우연히 한남서림에 들렀던 전형필은 평소에 옛 서적을 거간하는 골동 상인이 부지런한 걸음새로 한남서림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순황을 시켜 급히 그를 불러오게 했는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경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훈민정음》은 국내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책이었다. 책 주인이 1천 원을 불러서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는 그 거간의 말에, 전형필은 즉석에서 1만 1천 원을 내놓았다.
“좋은 물건은 제값을 주고 사야지요. 책 주인에게 1만 원을 전하고 1천 원은 수고비로 받으십시오.”
《훈민정음》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전형필이기에 이런 결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훈민정음》을 품에 넣은 전형필은 그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훈민정음》이 발견된 일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다. 만약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조선 총독부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했다. 우리말 사전을 만들려 했다는 것만으로 많은 한글학자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했던 그들의 손에서 《훈민정음》을 반드시 지켜내야 했던 것이다.
《훈민정음》에 대한 전형필의 사랑을 증명하는 일화가 또 있다. 해방이 되고 10여 년 후인 1956년, 고서점 통문관에서는 《훈민정음》의 영인본을 출판하는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영인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진을 찍기 위해 원본을 낱장으로 해체할 수밖에 없고, 그 작업이 진행되는 중에 자칫하면 책을 버리게 될 수도 있었다. 통문관 사장 이겸로는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전형필을 찾아가 자기 뜻을 간곡하게 이야기했다. 뜻밖에도 전형필은 선뜻 영인본 출판을 허락했다. 귀중한 책이니만큼 필요한 사람이 손쉽게 보고 공부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 전형필의 뜻이었다.
책을 해체해서 사진을 찍기로 한 날, 전형필은 훈민정음을 가지고 직접 인쇄소에 나타났다. 그리고 손수 책을 묶은 끈을 풀고 정성껏 한 장씩 해체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책갈피에 끼어 있는 먼지 하나조차 소중히 여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촬영 작업이 하루에 끝나지 않자, 밤늦은 시각에 전형필은 작업하던 책을 모두 싸들고 집으로 갔다가 다음날 다시 나와서 변함없는 태도로 촬영 작업을 지켜보았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훈민정음》 영인본을 통해, 오늘날 한글학자뿐만 아니라 일반 학생들까지도 《훈민정음》을 직접 보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한글 연구의 큰 획을 그은 일이다. 광복 이후 전형필은 문화재 수집하는 일을 멈추었다. 일제가 물러간 나라에서 누가 수집하든 그것은 우리나라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 신명을 바쳐 귀중한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그는 1962년 56세의 나이에 급성 신우염으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한상남 시인,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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