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길을 걷다 마주친 영화 포스터에 압도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각 작품의 포스터는 다양한 매체에서 쏟아지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대중의 눈을 사로잡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악의 하루>, <신세계>, <사랑의 불시착>, <부부의 세계> 등 수많은 관객을
매료시킨 포스터, 그리고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제작한 최지웅 디자이너를 만나보았다.
▲ 프로파간다 사무실 내부 전경
▲ 프로파간다 홈페이지
출처 http://propa-ganda.co.kr
안녕하세요. 저는 영화, 공연 등의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의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최지웅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포괄적으로 ‘영화 광고 디자인’을 진행하고 있어요. 영화 촬영이 시작되기 전 시나리오북 디자인부터, 포스터, 전단, 잡지광고, 버스광고, 전국의 극장배너 까지 모두 다 하고 있죠. 보통 영화사에서 주는 사진으로 디자인만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영화 이미지의 모든 것을 연출하고 총괄해요. 포스터 전체 콘셉트와 배우들의 포즈 등, 아이디어를 짜고 사진작가와 촬영을 진행하죠. 여기에다 작품의 특성을 잘 살린 제목 타이포그래피를 직접 제작한답니다.
프로파간다는 주로 공산국가에서 정치적으로 쓰이던 용어지만, 저희는 대중을 ‘홀리는’ 선동을 하고 싶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요. 저희가 만든 포스터를 보고 그 포스터에 매료되어 더 많은 관객이 극장으로 가는, 그때 가장 뿌듯함을 느껴요.
어렸을 때부터 극장 앞에 가면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포스터와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때는 극장의 포스터를 몰래 뜯어가기도 했죠. 한번은 영사실 기사님한테 그 현장을 걸렸는데, 계단 아래 창고로 따라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 그곳에 가보니 극장이 생긴 이래로 상영됐던 영화의 포스터가 전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저에게 “네가 갖고 싶은 만큼 다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에 남아있는 순간이네요. (웃음)
이후 고등학교 2학년 때 영화 잡지 <스크린>에서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의 인터뷰 기사를 봤어요. 마치 섬광이 제 심장에 딱 꽂히는 기분이 들었고, 어렴풋하게 있던 꿈이 선명한 목표로 자리를 잡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부모님에게 바로 말씀드려 입시 미술을 준비한 뒤 미대에 진학했어요. 대학을 졸업할 때쯤, 2000년대 초반에는 한국 영화 포스터 업계가 굉장히 성장하던 시기였어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시월애>, <집으로> 등 유명 포스터를 유심히 보니, 전부 하나의 회사에서 만들었더라고요.
마침 그 회사에서 신입 디자이너를 뽑았고, 지원해서 입사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다양한 것들을 배웠지만, 그중에서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됐어요. 경력을 쌓은 뒤 저만의 독립적인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었고, 그렇게 ‘프로파간다’를 설립했어요. 당시 배우 이나영과 오다기리 조 주연의 영화 <비몽> 포스터로 업계의 주목을 받았고, 이어 <워낭소리> 등이 많은 사랑을 받으며 저희도 함께 성장할 수 있었어요.
▲ 영화 <증인> 포스터
ⓒ프로파간다
▲ 영화 <부산행> 포스터
ⓒ프로파간다
▲ 영화 <최악의 하루>
ⓒ프로파간다
▲ 영화 <괴물> 포스터
ⓒ프로파간다
작품 장르에 따라 다르지만, 작품과 제목의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예를 들어 영화 <증인>의 경우 진중하면서도 가슴이 따뜻한 내용이거든요. 그 분위기를 담아내려 노력했고, <부산행>은 좀비가 할퀸 느낌의 표면으로 제목을 디자인했죠. 또, <최악의 하루>는 주인공의 심술궂은 표정과 영화의 밝은 분위기를 살릴 수 있도록 ‘최악’의 ‘악’을 마치 화난 얼굴처럼 보이게 디자인했어요. 배우 신하균, 여진구가 출연하는 드라마 <괴물> 포스터는 마치 괴물의 이마 위에 돋아있을 법한 ‘뿔’을 형상화해서 작업했고요. 이런 타이포그래피는 100% 수작업으로 진행해요. 직접 붓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쓰고, 스캔해서 컴퓨터에 옮겨요. 그 작품만을 위해 제작한 고유 서체가 필요하니까요.
저에게 영감은 작품 그 자체인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읽다 보면 배우의 대사에서, 혹은 줄거리 등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죠. 다만 평소 잡지, 공연, 사진집 등을 많이 보는 편이에요. 서점에서 좋은 사진 등을 볼 때 ‘이런 것은 어떤 장르의 영화에 어떻게 응용하면 좋겠구나.’ 하면서 생활 속에서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감독이나 영화는 많지만, 제 인생 영화를 꼽자면 <그랑블루>와 <시네마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모두 저의 청소년기에 개봉한 작품들이죠. 그런데 <그랑블루>가 한국에서 재개봉하게 되면서 포스터 제작을 저희 회사가 맡게 되었어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기쁨을 느꼈고, 작업하면서도 모든 순간에 정성을 다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저에게 작품의 제목을 표현하는 타이포그래피는 글자가 아닌, 하나의 이미지로 느껴져요. 그 작품을 상징할 수 있는 이미지 덩어리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따금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배우 김고은, 박해일이 출연하는 <은교>의 ‘교’라는 글자를 아름답게 표현하기까지 애를 먹었어요.
드라마 <밀회>의 ‘밀’자를 쓸 때 비밀스럽고 끈적거리는 느낌을 담고 싶어 거의 백번 넘게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할 때 리을과 이응 받침이 들어간다거나 초성에 히읗, 모음 아 모양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해요.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거든요.
약 10년 전만해도 유럽의 스위스 디자인, 영어로 디자인을 하는 게 유행이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글 붐, 복고의 유행과 함께 한글 타이포그래피가 다시 인기를 얻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폰트가 영어 폰트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 관계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해서 우리 것이 많아졌으면 해요.
저는 어린 시절의 꿈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에요. 거창한 목표는 아직 없지만, 지금처럼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하며 앞으로도 쭉 잘하고 싶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