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육지와의 왕래가 잦지 않던
조선 시대의 제주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당시 제주 백성의 삶을 생생히 기록한
국립한글박물관 소장품 『탐라별곡』을 소개합니다.
더불어 비슷한 시기의 제주도를 다른 방식으로 기록한
『탐라순력도』의 내용도 함께 전합니다.
『탐라별곡』
작자: 정언유 / 시대: 1749~1751년 / 크기: 31.5 x 20.9cm
조선 후기 정언유가 제주 목사로 부임했을 때,
제주에서 겪은 자신의 순력 체험을 노랫말로 풀어낸 기행가사입니다.
순력이란 자신의 부임지를 공식적으로 순찰하는 제도인데요.
『탐라별곡』에는 순력 당시 제주 백성의 힘겨운 삶을 보고
안타까워했던 정언유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탐라별곡』 속 제주도
정언유는 자신의 순력 체험과 아름다운 풍경 이야기 대신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제주 백성의 모습을 『탐라별곡』에 상세히 적었습니다.
당시 제주도의 땅은 팍팍하고 메말라 있었으며
자연재해가 잦아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습니다.
또한 말과 소를 돌보고 해산물을 진상하는 등
제주 백성은 과중한 부역에 시달리고 있었죠.
애민정신
정언유는 제주 백성의 눈높이에 맞춰 그들의 삶을 바라보았습니다.
제주 백성을 중앙의 백성과 동일하게 생각하며,
피폐하고 암담한 삶을 사는 그들을 걱정했죠.
또한 제주 백성을 위로할 때에도 그들을 무지한 교화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유교적 도리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대했습니다.
실제로 정언유는 제주 백성의 힘겨운 처지를
중앙에 알려 구휼미 3천 석을 받기도 했답니다.
▲『탐라순력도』의 <애월조점>
『탐라순력도』
병와 이형상의 제주도 순력 과정을 담은 화첩으로
총 41폭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공 김남길에 의해 그려졌으며 『탐라별곡』보다 50년 앞서 창작됐는데요.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과 공간별 특징이 아주 상세히 드러나 있답니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과 <귤림풍악>
『탐라순력도』 속 제주도
『탐라순력도』에는 18세기 초 제주도의 지형과 풍경은 물론
관아 건물, 군사·방어 시설, 성곽 구조 등의 내용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물 진상과 행사, 행정 체제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답니다.
그중 <한라장촉>은 제주도의 전반적인 행정·지리정보를,
<귤림풍악>은 귤을 재배하는 과원에서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탐라순력도』의 <건포배은>
<건포배은>
‘건포배은(巾布背恩)’은 ‘임금님의 은혜에 감사해 절을 올린다’는 뜻입니다.
이 그림을 살펴보면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는 모습과 함께
산 아래 불타고 있는 신당과 사찰이 보이는데요.
이형상은 제주도의 토속신앙을 척결하고 유교 질서를 세우기 위해
신당 129곳과 사찰 5곳을 허물었고 이러한 자신의 조치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똑같은 공간이지만 서로 다르게 바라본 두 작품을 소개했는데요.
『탐라순력도』에서는 18세기 제주도의 다채로운 모습을,
『탐라별곡』에서는 당시 거주 도민의 애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한글 기록 『탐라별곡』을 통해
백성을 생각하는 정유언의 마음을 느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