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여태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개관 이래 첫 패션쇼가 관내에서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박물관을 찾은 가운데, 3층 복도와 전시실이 런웨이가 되었다. 모델들이 입고 있는 한글로 디자인된 옷들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우리에게 문자로 익숙한 한글이 새로운 변화와 시도를 관람객들에게 선보인 것이다.
한글이 옷이 된 것처럼 한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그리고 한글의 현대적인 변화와 가능성에 대해 시민들에게 꾸준히 전하는 전시가 있다. 바로 <한글실험프로젝트>다.
지난 9월 9일, 국립한글박물관은 기획전시실에서 <제3회 한글실험프로젝트 한글디자인: 형태의 전환> 전시를 열었다. 2020년 2월 2일까지 진행되는 이 전시는 한글의 조형 원리를 가지고 기존의 틀을 깨보고 새로운 규칙을 만드는 실험을 진행했다. 특히, 한글 창제 원리가 가진 조형적 특성 중 ‘조합’과 ‘모듈’의 개념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글자와 사무 간 연관 유희로서 한글을 바라보고자 했다.
<한글실험프로젝트>는 한글의 특징에 주목해 디자인적 관점에서 한글을 재해석하여 예술 및 산업 콘텐츠로서 한글의 가치를 조명하는 프로젝트다. 2016년 <훈민정음과 한글디자인>를 통해 한글의 원형을 주제로 첫 전시를 열었고 2017년 <소리x글자 한글디자인> 전시로 한글의 소리에 집중하는 전시를 개최했다. 이번 3번째 프로젝트는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을까? 이전 전시들과 차별화된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한글실험프로젝트는 어떻게 운영될까? 그리고 전시 개막일에 열린 패션쇼에 대한 뒷이야기 등 다양한 궁금증을 안고 <한글실험프로젝트>를 담당하는 김은재 국립한글박물관 학예사를 만났다.
지난 <한글실험프로젝트> 전시는 핵심 단어들이 존재했습니다. 1회는 원형, 2회는 소리였죠. 이번 3번째 전시의 핵심 단어는 무엇인가요?
한글의 형태예요. 소리와 형태가 만나는 것이 한글이기 때문에 원형, 소리에 이어 자연스럽게 형태를 주제로 했어요.
이전에 진행된 한글의 형태를 다룬 전시들과는 차별화된 점이 있나요?
한글의 형태를 주제로 하는 기존 작업물들이 ‘ㄱ’,‘ㄴ’처럼 형태의 일차원적인 접근이 많아서 저희 전시에는 차별성을 두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글의 내재적 속성, 특징에 집중했고 그것을 ‘모듈’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실용디자인으로서 한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얼마만큼 한글이 일상에 가까이 올 수 있는지를 알리고자 패션 디자인 분야 전문가들과 협력하게 됐죠. 한글의 합리성을 보여주는 52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한글의 합리성을 언급하셨는데, 한글의 합리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나요?
한글은 합리적인 문자면서 실용성이 가득한 문자예요. 점, 선, 원을 토대로 기하학적으로 만들어져서 쉽게 응용되고 변형돼요. 기본자 8개만으로 11,175자까지 변환되는 유연한 문자이니까요. 또한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도 한글이 합리적인 문자라고 말하는 이유고요.
<한글실험프로젝트>는 전시와 함께 전시에 알맞은 훈민정음 문구를 적는다. 지난 1회 때는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라는 세종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세종이 구현하고자 했던 소통 정신의 결정체인 훈민정음의 원형을 주제로 삼았다.
2회 전시 때는 ‘소리를 바탕으로 글자를 만들어 만물의 정(情)을 통하게 하였다’라는 문구를 가져왔다. 이는 조선시대 집현전 학자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 기록한 말로 전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취지를 대변했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는 어떤 문구를 가져왔을까?
지난 두 전시에서 훈민정음 문구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훈민정음의 어떤 문구를 가져왔나요?
이번에도 전시와 알맞은 훈민정음 문구를 담으려고 했어요. 전시의 취지와 관련 있는 문구가 있었지만 지난 전시들만큼의 감정이 오는 문구가 없어서 별도로 표기하지 않았어요.
이번 전시에서 어떤 작품들을 눈여겨보면 좋을까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까다로운 절차를 걸쳐 뛰어난 작가들을 섭외했어요. 참여 작가들도 이번 전시를 위해 신작을 만들정도로 열성적으로 참여해주었기에 운영하는 입장에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한글마루’에 눈길이 가요. 한글의 속성을 잘 표현했을 뿐 아니라 실용화되어 만들어져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요.
디자인을 다룬다는 것, 작가들과 협업했다는 것만으로 새로운 시도들이 벌어졌을 것 같아요. 지난 전시 때와는 준비하면서 다른 것들이 있었나요?
맞아요. 말씀해주신 부분들과 함께 그래픽 디자이너와 제품 디자이너, 혹은 그래픽 디자이너와 생산자가 만나 협업하는 것, 그리고 전시 구성보다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어요. 또, 지난 5월부터 전시 준비를 시작하면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사전실험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한글의 형태에 대한 여러 의견을 모으며 수많은 키워드들이 나왔고 디자이너들과 소통하며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전시 설명에 보면 ‘유희’라는 글자가 보여요. 한글과 패션, 디자인의 만남 속에서 유희라는 단어가 신선해 보이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요?
한글이 유희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제가 청년일 때는 디자이너들이 한글을 쓰는 것 자체가 고정관념이 많았어요. 한글로 디자인을 하면 촌스러워 보인다는 편견, 그리고 우리가 한국인이기에 한글을 사용하는 데 스스로 제약을 걸었던 부분까지 있었어요. 그렇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청년들이 한글을 자유롭게 활용하고 수용하는 것 같아요. 한글이 더 이상 제약 속에 있는 것이 아닌, 우리에게 가깝고 친숙한 유희의 대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패션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관 이래 첫 패션쇼인데 어떻게 진행된 건가요?
프로젝트 준비하면서 패션 분야를 처음 도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패션쇼가 언급됐어요. 개막식 때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여러 방법을 찾았고 서울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서울 365 패션쇼’ 사업과 연이 닿아 여러 협의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다행히 저희가 밀라노에서 전시했던 한글 패션 의상들도 구비돼 있어 함께 진행했어요.
처음 진행하는 행사여서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니요. 전혀요(웃음). 국립한글박물관은 굉장히 젊은 박물관이에요. 직원들 대부분 생각도, 마음도 열려 있어요. 그래서인지 패션쇼를 제안했을 때 우려를 나타낸 분이 아무도 없었어요. 콘텐츠가 확실히 맞아떨어졌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거죠.
패션쇼를 통해 어떤 점들을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나요?
저희는 패션쇼라는 행사를 통해 한글 디자인 작품과 한글 패션 의상이 잘 접합되는 지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를 위해 패션쇼 측과 여러 얘기들을 나누었고요. 그리고 쇼가 끝난 후, 전시장 안에서 모델들이 포즈를 취했던 부분도 저희 전시에서 핵심적인 부분이었죠.
패션쇼 당일 행사를 마친 모델들은 약 20분간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하면서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과 실제 모델들이 입은 것이 비교되면서 다양한 볼거리를 전했다. 많은 시민들이 남녀노소 상관없이 사진으로 남기면서 단순히 전시를 넘어 실용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한글실험프로젝트>는 어떻게 해서 탄생되었나요?
초대 관장님인 문영호 관장님의 아이디어로 시작됐어요. 한글 디자인에 관한 전시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죠. 그리고 당시 과장님이었던 이애령 과장님(現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 과장)이 지속성 있는 전시로 가야 한다고 굉장히 강조했어요. 한글박물관의 살길이라면서 차별성 있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나갔죠. <한글실험프로젝트>라는 이름을 직접 만든 분이에요(웃음). 지금은 다른 곳에 계시지만 여전히 관심 가져주시고 많이 응원해주세요.
지속적이면서 차별성 있는 프로젝트. 말은 쉽지만 이것을 구현하기 어렵지 않나요?
어렵죠(웃음). 어떻게 차별화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이 이어지고요. 아무래도 주제가 한글이다 보니 정보 전달, 이해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를 이어갔던 것 같아요. 한 회 한 회 진행하면서 자리를 잡아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첫 3회까지는 기초 단계라고 보고 기본적인 내용을 주로 다뤘으나, 4회부터는 본질을 넓혀서 다른 학문과의 접점을 찾아보고 싶어요. 목적이 뚜렷한 전시를 염두에 두고 다양하게 진행하고 싶어요.
그럼 앞으로 실험할 한글 콘텐츠들로 생각하신 게 있나요?
여러 아이디어가 제시됐지만, 그 중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어린이를 주 타깃으로 하는 한글 교구를 다루면 어떨까 해요. 평소 어린이 교육에 굉장히 관심이 많고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글 교구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아이들에게 잘 만들어진 것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요. 저희 박물관에 좋은 디자이너 분들이 많으니 교육자들과 함께 협업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요.
<한글실험프로젝트> 전시는 1회 때부터 해외 전시와 국내 전시를 번갈아가며 진행했다. 1회 때는 일본, 2회 때는 미국, 그리고 3회 때는 프랑스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글의 색다른 접근과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지난 두 번의 전시들은 해외 전시 이후 국내 전시로 이어졌는데, 이번 전시는 국내 전시부터 시작하네요?
네, 프랑스한국문화원에서 공사하는 바람에…. 더 기다리기 어려워 국내 전시부터 시작했어요. 프랑스에 현지에서는 2020년 10월에 전시가 개막할 예정이에요.
해외 반응은 어떤가요?
사실 엄청난 붐업은 아니에요. 한정된 장소에서 매우 좋은 반응을 기대하는 건 쉽지 않죠. 그러나 K-POP 등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들이 늘어났고, 이를 통해 한글을 소개하는 면에서 긍정적이라고 봐요.
그리고 해외 반응도 중요하지만 국내 반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익숙한 우리 문자라서 홀대시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고, 우리 문자가 어떤 수준까지 표현될 수 있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국내 전시에 신경을 더 많이 쓰죠. 그래서 지속적인 홍보를 하고 있는 편이에요. 이번에 한글실험프로젝트만의 인스타그램을 신설해서 더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몇몇 분들이 한글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아쉬워하셨는데 구체적인 예가 있을까요?
최근 한 언론인이 “‘ㄱ,ㄴ,ㄷ’이 보이지 않으니 한글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말을 하셨어요. 한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 거죠.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글에 대한 사고가 유연해지길 바라요. 어른들은 무조건 읽을 수 있어야 하고 글자여야 한다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아이들은 형태가 어떻더라도 한글을 자유롭게 바라봐요. 어른들도 아이들의 시선처럼 한글을 유연하게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전시에서 작품들을 보며 한번 느껴보셨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한글은 현대적인 글자예요. 15세기에 만들어진 모던한 문자죠. ‘우리 문자가 이렇게도 표현되는구나’, 혹은 ‘한글로 만들어진 가구, 마루, 패션 등 우리 생활 속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구나’란 공감대가 형성됐으면 해요. 아!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해설사 안내를 들으면서 전시를 관람할 수 있어요.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말처럼 홀로 전시를 관람하는 것보다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하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한글실험프로젝트>는 국립한글박물관의 시그니처 전시다. 타 전시와 다른 차별화된 한글 전시이자 박물관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전시다. 또한 여러 체험 프로그램들을 신설하며 한글이 더 친숙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의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들이 선택할 한글 변화의 방향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