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기사
내 삶을 담은 노랫말의 힘,
국립한글박물관 2020년 첫 기획특별전 <노랫말-선율에 삶을 싣다>
국립한글박물관은 2020년 첫 번째 기획특별전으로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소개하는 <노랫말-선율에 삶을 싣다>(2020.5.15.~10.18.)를 준비했습니다. 대중가요를 구성하는 요소는 수없이 많겠지만, 우리 언어와 문자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힘쓰는 한글박물관에서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았습니다. 그간 대중가요를 주제로 한 다양한 전시가 있었지만 대중가요 앨범이나 가수가 아닌 ‘노랫말’을 본격적으로 다룬 대형 전시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시장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알려진 <낙화유수>(1929년)부터 진정성 있는 노랫말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의 <IDOL>까지 총 190여 곡의 대중가요 노랫말과 더불어, 각종 대중가요 음반·가사지·노랫말 책·축음기 등 총 206건 222점의 전시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1부 ‘노랫말의 힘’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오늘날까지 대중의 관심사에 따라 그 형식과 소재를 달리하며, 대중이 살아온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노랫말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20년대부터 1945년 이전까지는 식민 지배 아래에서 대중이 겪은 설움과 울분을 비유적인 단어들로 표현하는 시 같은 노랫말이 유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알려진 <낙화유수>(1929년)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노랫말을 수정한 <목포의 눈물>(1935년) 등이 대표적입니다.
노랫말의 첫 소절을 따라 ‘강남달’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낙화유수>는 본래 무성 영화 「낙화유수」(1927년)의 주제가였습니다. 무성 영화에서 극의 진행 및 등장인물의 대사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변사(辯士) 김서정(金曙汀, 1898~1936)이 곡과 노랫말을 지었는데,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어 1929년 정식으로 음반이 발매되었습니다. ‘강남 달이/밝아서/임의 놀던 곳’, ‘물망초 핀/언덕에/외로이 서서’와 같이 각 행의 글자 수를 맞춰 시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음율에 맞춰 앞 구절과 뒷 구절을 띄어쓰기 없이 한 덩이처럼 적거나, ‘물에 ᄯᅳᆫ’, ‘ᄭᅢ울 ᄯᅢᄭᅡ지’처럼 오늘날 사용되지 않는 표기 방식을 사용하는 특징도 볼 수 있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초 오케레코드사가 조선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개최한 전국 도시 ‘향토 찬가’ 모집에서 당선된 노랫말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에 관한 노랫말로 읽히지만, 2절의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은 본래 ‘삼백년 원한 품은’이라는 노랫말이었는데,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발음만 비슷한 다른 표현으로 수정한 것입니다. 우리말의 표기와 발음을 미묘하게 변형한 노랫말로 민족의 설움을 달래 주었던 <목포의 눈물>은 음반 발매 당시 5만 장 이상이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195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위로한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7년 추정)와 미8군 쇼 등을 통해 들어온 이국적인 지명과 리듬을 섞은 <늴리리 맘보(1957년)> 같은 노랫말이 인기를 얻었습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작사가 반야월(半夜月, 1917~2012)이 한국 전쟁 당시 미아리 고개에서 딸을 잃은 심정을 담은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약연기’, ‘철사줄’, ‘북풍한설’, ‘감옥살이’ 등의 노랫말은 전쟁의 참혹함을 잘 드러내 줍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처럼 전쟁기의 피난지이자 임시 수도였던 부산, 부서진 철교를 기어올랐던 피난민들의 한이 서린 대동강 등 전쟁과 관련된 사연이 얽힌 실제 지명이 많이 활용된 것이 이 시기 노랫말의 특징입니다.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3년간의 피난살이가 끝난 후, 서울에서는 맘보를 중심으로 한 춤 노래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부기우기’, ‘맘보’, ‘차차차’처럼 음악이나 박자의 이름을 활용한 흥겨운 제목과 노랫말은 전쟁으로 어둡고 무거워진 사회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늴리리 맘보>는 경기 지역의 민요 <늴리리야>의 소재를 빌린 것입니다. 피리, 퉁소, 나발 등 관악기의 소리를 흉내 낸 ‘늴리리’를 섞어 ‘늴리리야 늴리리 늴리리 맘보’라는 노랫말을 유행시켰습니다.
1960~70년대에는 도시의 화려한 성장과 이상을 표현한 <임과 함께>(1972년),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오는 소외감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고향역>(1972년) 노랫말이 동시에 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1970년대 들어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우리도 잘살 수 있다’라는 기대와 희망을 담은 노랫말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서구의 영화 속에 펼쳐진 초원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남진(南珍, 1946~)의 <임과 함께>는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한편 나훈아(羅勳兒, 1947~)의 <고향역>은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랫말로 돈을 벌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온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한편 1970~80년대에는 포크송과 발라드가 유행하면서 <아침이슬>(1971년)처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이거나 <사랑하기 때문에>(1987년)처럼 서정적인 노랫말이 대중에게 큰 반응을 얻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창작 작품이 늘어난 포크송은 담담하고 진솔하게 삶을 표현한 노랫말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 모임에서 <아침이슬>의 인기가 높아지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의 ‘묘지’라는 노랫말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하였습니다. 1970년대 중반 대중문화계의 대마초 파동으로 잠시 주춤했던 포크송은 1980년대에 들어 ‘발라드’의 형태로 다시 한 번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유재하, 김광석 등의 인간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담은 노랫말은 대중가요 노랫말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시장에는 1960~70년대를 휩쓸었던 그 당시의 음악다방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삼삼오오 모여 앉을 수 있는 탁자와 소파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음악다방에 깔린 은은한 커피향을 맡으며 당시에 유행했던 노래와 노랫말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 대중을 대상으로 한 문화적 표현이 한층 자유로워지고 한류, K-pop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노래가 주목받게 되면서 노랫말의 주제와 성격도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최근에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표현하라는 자존감과 정체성을 강조한 노랫말들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전시장에는 작사가 *지명길과 **이호섭이 노랫말과 삶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삶의 노랫말, 노랫말의 삶’ 영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192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노랫말이 담아 온 대중의 삶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 온 노랫말의 삶을 다양한 노래, 노랫말, 사진 자료와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지명길: 최진희 <사랑의 미로>(1984), 혜은이 <파란나라>(1985), 이지연 <난 사랑을 아직 몰라>(1987) 등 작사
**이호섭: 박남정 <사랑의 불시착>(1988), 주현미 <짝사랑>(1989), 주현미 <잠깐만>(1990) 등 작사
2부 ‘노랫말의 맛’은 대중가요 노랫말에 담긴 말과 글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내용과 체험을 준비했습니다. 외국의 노랫말을 번안하여 새롭게 쓴 우리의 노랫말부터 시로 쓴 노랫말까지 다양한 언어문화적 주제로 노랫말의 맛을 느껴 보고, 평범한 일상의 언어가 아름다운 한 편의 노랫말로 태어나는 과정도 볼 수 있습니다.
노랫말은 소리의 높낮이나 길이에 따른 음의 흐름에 얹혀 전달되기 때문에, 박자에 따라 길이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도 하고, 특정한 말소리나 단어와 문장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박자로 인해 노랫말이 갖게 된 ‘줄이고 늘리기’, ‘추임새 넣기’, ‘운 맞추기’ 등의 특징은 노랫말을 한층 부드럽고 맛깔스럽게 만들어 줍니다. 전시장에서는 이 같은 노랫말의 기술들을 5명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재해석한 노랫말 포스터 작품도 볼 수 있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이번 전시의 기획을 위해 2019년 전시 토대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연구의 일환으로 192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약 2만 6천여 곡의 노랫말에 사용된 단어의 빈도를 분석하였는데, 그 결과 시대를 불문하고 노랫말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에 전시장에서는 노래 제목이나 노랫말에 ‘사랑, 말, 사람, 눈물, 마음, 가슴, 세상’ 등의 상위 빈도 단어가 들어 있고, 사랑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 19곡을 믹싱하여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믹싱한 노래는 노랫말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연출 영상 및 조명과 함께 신나게 즐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다중 매체가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 노래는 이미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닌 보고 느끼는 대상으로 전환된 지 오래입니다. 이에 따라 노랫말의 의미가 가슴으로 채 전달되기도 전에 화려한 선율과 빠른 박자가 대중의 귀를 사로잡곤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 울림을 주고 세월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노래는, 내 마음을 읽어 주는 노랫말을 가진 노래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 전시가 그동안 노래의 곡조에 이끌려 무심코 흘려보냈던 노랫말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보고, 내 삶의 선율과 박자를 담고 있는 나만의 대중가요 노랫말 한 소절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시간당 100명 사전 예약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립한글박물관 누리집(www.hangeul.go.kr)을 통해 사전 예약을 하시면 보다 편안하게 전시를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아울러 코로나 19로 인하여 전시장을 방문하기 어려운 관람객을 위한 온라인 홍보 영상이 박물관 누리집을 통해 연재될 예정이오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