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도 전염병이 있었을까요? 우리 조상들은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이번 <소장품 이야기>에서는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2079호
『간이벽온방언해』를 통해 전염병에 대처하는 옛 사람들의 자세와 방법을 소개합니다.
- 한 집안을 멸문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뻗쳐 옮기니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 어디서, 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현재 어디까지 퍼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우리에게 커다란 공포를 줍니다. 전염병은 조선 시대에 ‘역병, 온역, 여역, 역질’ 등으로 불렸는데, 『간이벽온방언해』에서는 환자를 모질게 고통스럽게 한다는 점에서 ‘모딘 병’이라고도 일컫고 있습니다.
전염병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신분이 높은 자와 천한 자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왕가를 비롯해 사대부 가문에서도 그 두려움이 매우 컸습니다. 위생 관리에 어려움이 컸던 백성들에게는 두말할 것 없이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역신에 대한 두려움은 신라 시대에 기록된 노래 <처용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옛 사람들은 전염병이 역신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공손히 제사를 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이겨내려 했습니다.
“역병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증세가 같아서
나쁜 귀신의 기운과 같으므로 역병이라 하는 것이니,
병의 기운이 서로 전염되어 한 집안을 멸문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뻗쳐 옮기니
반드시 미리 약도 먹고 액막이를 하여 막으라.”
- 『간이벽온방언해』 중에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염병에 대해 총 1,455건의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역사가 518년이니 평균적으로 1년에 2~3건의 전염병 기록이 있는 셈입니다. 지금보다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조선에서 어쩌면 전염병은 일상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종 19년(1524년)에 일어난 전염병은 특히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평안도 전역에 퍼져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고 평가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중종은 각 지방에 의관과 약을 내려 보냈으나 전염병은 쉬이 걷히지 않았습니다. 국왕이 스스로 구완 방법을 모르겠다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평안도 관찰사의 보고 문서를 보건대,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3백 60여 명이나 되고 병세가 점점 거세진다 하니,
내 염려와 조정의 염려가 어찌 우연하겠는가. 구완하는 방도를 어떻게 하면 될는지 모르겠다.
(중략) 제사를 베풀어 효험이 있을는지 알 수 없다.”
- 『중종실록 52권』, 중종 20년 1월 3일 임술 3번째 기사
전염병이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나 전쟁 등과 복합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그 피해는 더 극심했습니다. 특히 인구의 감소는 국가의 생산력, 군사력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염병을 다스리지 못하면 통치자에게는 상당히 큰 부담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면 백성의 원한으로 전염병이 생긴다거나, 하늘에서 내리는 벌이라는 생각도 있었다고 합니다. 국가를 원만히 다스리고 민심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라도 조정에서는 전염병에 잘 대응해야 했습니다.
의역서의 편찬과 간행은 역병에 대한 조정의 대응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세종 시대에도 세종 5년(1423년), 9년(1427년), 19년
(1437년), 29년(1447년)에 나라에 크게 전염병이 창궐하였는데, 세종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1433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만들게 하고, 1455년에는 동양의 의학 지식을 집대성한 사전 『의방유취(醫方類聚)』를 완성합니다. 온열(溫熱)에 의해 발생한 역병의 치료법을 담은 『벽온방』도 만들었는데요, 이들 책을 참고하여 새로이 편찬한 책이 바로 『간이벽온방언해』입니다.
1524년 가을에 평안도 지방에서 발생한 역병이 다음 해까지 이어지자, 중종은 의관들에게 전염병의 치료와 대처 방법을 책으로 만들게 합니다. 그리고 한글 풀이를 달아 전국에 배포하여 사람마다 쉽게 전염병에 대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간이벽온방언해』에는 당시 전염병의 원인과 증상, 대처 방법 등이 실려 있습니다.
“갑신년(1524년) 가을에 관서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다음해 을유년(1525년) 봄에 이르도록 많은 사람이
죽어감이 그치지 아니하니 왕이 낮이나 밤이나 시름이 많아 (중략) 의관들로 하여금 약을 주고
지역에 보내시면서 생명을 구하라 하시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할 것이라 생각하시어
(중략) 열이 많이 나는 병에 대해 치료하는 법을 가려 뽑아 편집하여 한 편의 책을 만들라 하셨으니,
그 이름을 『간이벽온방』이라 하고 이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고,
궁촌(窮村)이나 벽항(僻巷)의 사람이라도 병 고치는 방법을 쉽게 알도록 하여 목숨을 구하도록 하시니”
- 『간이벽온방언해』 서문 중에서
현재 『간이벽온방언해』의 원간본은 전하지 않고 선조 11년(1578년)에 금속활자 을해자로 인쇄한 것과 광해군 5년(1613년)에 목활자인 훈련도감자로 인쇄한 중간본이 전하는데,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을해자본입니다.
책 안쪽에 “萬曆六年正月日 內賜成均館博士金緝簡易酸瘟方一件 命除謝恩 都承旨臣尹”의 내사기(內賜記)가 적혀 있고 본문 첫 번째 면에 왕실에서 하사했음을 증명해주는 인장인 ‘선사지기(宣賜之記)’ 도장이 찍혀 있어, 선조 11년인 1578년에 당시 도승지였던 윤두수(尹斗壽, 1533~1601)에 의해 성균관 박사 김집(金緝, 1610-?)에게 반사(頒賜, 임금이 백성에게 물건이나 녹봉을 줌)된 책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이벽온방언해』에서는 전염병의 원인으로 위생 문제와 더불어 나쁜 기운의 문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질병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더러운 시궁창뿐만 아니라 원한이나 죽음의 기운 또한 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데요, 『간이벽온방언해』에서도 질병에 대한 무속적 대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시궁창을 쳐서 흘려보내지 않아 그 더러운 나쁜 것이 사람에게 쏘이어 병이 된다.
땅에 많은 사람이 죽은 기운이 왕성하게 일어나 병이 된다.
벼슬아치가 백성을 억압하여 원수가 됨으로 인해 병이 된다.
이리하여 생긴 병을 나열하면 감옥에서, 시장에서, 무덤에서, 사당에서, 신사에서,
산에서, 바다에서, 집에서, 부엌에서, 날씨로, 하늘에서, 땅에서 생긴 온역 등이 있다. (중략)
사방 가운데 땅을 파되 깊이가 석 자이고 너비도 같게 한 다음 깨끗한 모래 석 섬으로 메우고
좋은 술 석 되를 그 위에 붓고 고을 원님으로 하여금 신령에게 빌게 하여라.
악성 기운을 덜게 하는 좋은 방술이다.”
- 『간이벽온방언해』 중에서
조선 시대의 전염병은 주로 열을 동반한 것이었습니다. 『간이벽온방언해』에서는 증상과 상황별로 구체적인 대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예컨대 추위로 인한 병은 다음과 같이 대응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볶아서 털을 제거한 향부자(香附子) 넉 냥, 감초(甘草) 구운 것 한 냥, 자소엽(紫蘇葉) 넉 냥,
흰 것을 없애지 않은 진피(陳皮) 두 냥, 창출(蒼朮) 두 냥 등을 굵게 썰어서
한 번 복용할 때 서 돈씩 해서 여기에 물 한 사발을 부어 달인 것이 일곱 푼이 되거든
찌꺼기를 없게 하고 뜨거운 것을 먹되 때를 가리지 말고 하루에 세 번씩 먹어라.”
- 『간이벽온방언해』 중에서
전염병에 걸리지 않게 하려면 다음과 같이 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살균을 통한 방법이나 개인의 위생 관리에 대한 내용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전염병의 대응에 전혀 효과가 없을 것 같은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요법은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것이었기 때문에 책을 읽는 백성들에게는 신뢰를 주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모진 병에 걸린 집에 들어가서 서로 전염되지 않게 하려면 석웅황(石雄黃, 황금석)을 갈아 물에 풀어 붓으로 많이 묻혀 콧구멍에 바르면 병 걸린 사람과 한 곳에 앉아도 전염되지 않으니 낯(얼굴) 씻은 후와 누워서 잘 적에 찍어 바르라.
전염성 열병을 앓는 집에는 저절로 나쁜 기운이 발생하니 그 기운을 맡으면 즉시 숨구멍으로 올라가 온 혈맥에 퍼져서 옮아 서로 전염되니, 만일에 약이 없거든 참기름을 코에 바르고 종이 심지로 코침을 놓아 재채기를 하도록 함이 좋다.
집에 모진 병이 옮아오거든 즉시 처음 병에 걸린 사람의 옷을 빨아 깨끗하게 하여 밥을 찌는 시루에 찌면 곧 병이 전염되지 않는다.
새 베로 만든 주머니에 붉은 팥을 넣어 우물에 이틀 정도 담가 두었다가 그 집 사람들이 각각 스물한 개씩 삼켜라. 또한 솔잎을 곱게 갈아 한 숟갈씩 술에 풀어서 하루에 세 번씩 먹어라. 또한 동쪽으로 향한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잘게 썰어서 달인 물로 목욕하여라.
대나무를 태우면 그 소리가 요사스러운 기운과 같은 나쁜 것을 쫓아낸다. 또 수릿날 쑥으로 사람을 만들어 문 위에 걸어 두면 열병을 없게 한다.
동짓날에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먹으면 악성 질환을 없게 한다.
돼지의 똥은 모두가 앓는 전염성 열병과 황달을 치료하니 암퇘지의 똥 한 되를 물에 담가 하룻밤 재워 찌꺼기를 없애고 다 먹어라. 수컷 여우의 똥을 불 피우면 열이 많이 나는 전염병을 없게 한다. 또한 너구리의 고기는 독한 유행병의 기운과 열이 많이 나는 병을 없게 하니 평소에 먹듯이 만들어 먹어라.
조정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한 『간이벽온방언해』는 각 관청으로 내려 보내어져 전국에 배포되었습니다. 한글 번역문을 달아 배포되었기에 더 많은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문 원문을 한 단락씩 나누어 먼저 쓰고 뒤이어 이를 한글로 번역한 것은 『소학언해(小學諺解)』 등 유교 경전을 언해한 것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하지만 유교 서적 언해본과 달리 번역문에 주요 용어를 한자로 쓴 것 이외에는 거의 대부분 한글을 사용하였다는 점이 특징인데, 이때에도 한자 옆에 한글 음을 달아 읽기 쉽게 하였습니다. ‘얼운(어른), 아해(아이), 쉬궁(시궁창), 복셩화(복숭아), 도티(돼지)’ 등은 백성들에게 친숙한 단어들입니다. 한문을 전혀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만든 책임을 알 수 있어 중종의 애민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16세기의 국어 표기법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자, 불교나 유교와 같은 종교 서적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책이 만들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간이벽온방언해』는 이러한 가치를 널리 인정받아 2020년 10월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참혹한 전염병의 공포 속에서도 경험과 지혜를 모아 대처 방법을 책으로 만들고 널리 나누면서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습니다. 조선시대의 경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병들었으나 가난해서 약을 살 수 없는 자에게 관에서 약을 지급하며 지방에서는 고을에서 의약을 지급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전염병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모두가 풀어내어야 할 공동의 문제로, 정부와 백성 모두가 마음과 힘을 모아 대처했던 것입니다.
코로나19로 혼란을 겪고 있는 지금, 우리는 예전처럼 보고 싶은 사람들과 자유로이 만날 수 없고, 가고 싶은 곳에 마음껏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위기를 통해 사회가 정한 규칙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 개인의 자유보다 모두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도 『간이벽온방언해』와 같은 공동의 지침서에 적힌 내용을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병을 옮기지 않도록 행동을 삼가며 위기를 이겨냈을 것입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나박김치의 국물을 마시면서, 설날 아침에 마늘과 생강 등을 달인 물을 함께 먹으면서, 동짓날 팥죽을 쑤어 먹으면서 나누었던 마음들이 재난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모두가 하나 되는 마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성자 : 문영은(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