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제목이 담긴 표지는 책의 얼굴로, 작품의 내용과 분위기를 모두 담아낸다.
때문에 대중에게 책의 첫인상을 남기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특히 국내 책의 표지는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대중의 시선을 끄는데,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의 한글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한 정지현 디자이너는
책마다 그에 알맞은 다채로운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사용해 대중을 사로잡았다.
현재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인쇄물 속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디자인하는
정지현 디자이너를 만나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디자인 스튜디오 ‘즐거운생활’을 운영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정지현입니다. 현재 북 디자인을 기반으로 잡지, 포스터 등의 인쇄물과 온라인 홍보물, 상품(MD), 브랜드 이미지 통합화 작업(BI) 등을 기획해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저는 광고·홍보회사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는데요. 하나의 프로젝트를 온전히 책임지며 일할 수 있는 분야가 적성에 맞다고 생각해 디자인기획사로 이직한 뒤에는 책, 페스티벌 홍보물, 포스터 등 여러 장르의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어떤 정체성을 가진 디자이너로 살아갈지 고민을 많이 했죠. 다양한 디자인 분야 중 나의 전공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중 쉽게 휘발되지 않는 책의 특성에 큰 매력을 느껴 출판사에 입사했어요.
▲ 디자이너라는 ‘정체성’을 담은 명함
▲ 줄넘기의 즐거움과 통통 튀어 오름을
연상하게 하는 ‘즐거운생활’의 로고
북 디자이너로서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지만, 스스로 정체성을 한정하기보다 다양한 활동을 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마침 근속 10주년이 되었고 ‘10주년 기념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퇴사 후 조금 쉬어가며 이직 등의 앞날을 생각해보려 했으나, 의뢰받은 일들을 정신없이 하다 보니 어느새 독립 스튜디오를 차리게 되었네요. (웃음)
▲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표지 ▲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표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워낙 국내에 팬이 많은 데다 저 역시 좋아하는 작가라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하지만 그만큼 디자인을 잘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특히 국내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 단행본의 이미지를 바꿔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글 타이포그래피에 더 신경 써 작업했는데요. 뭉툭한 연필로 어린이가 일기 쓰듯 글씨를 쓰기도 하고, 종이테이프를 찢어서 직접 글자를 만들기도 했죠. 그의 작품 중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는 클래식 대담집인데, 제목의 자음과 모음을 운율이 느껴지는 형태로 해체해 그래픽 요소로 사용했어요. 음표나 오선지 같은 음악의 상징물을 쓰지 않고도 음악을 표현한 거죠.
북 디자이너는 책에 옷을 입히는 일을 해요. 옷차림이 그 사람의 취향이나 특징을 드러내듯, 어떻게 하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요. 책 표지와 내지 디자인을 비롯해 마케팅을 위한 광고와 상품도 디자인하는 등 책의 전반적인 인상을 만들어 내죠.
표지의 한글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할 때 먼저 기성 서체를 그대로 사용할지, 그 서체를 변형해서 사용할지, 캘리그래피나 아트웍으로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 낼지를 결정합니다. 이때 제 작업이 원고의 방향에 맞는지, 만약 새 서체를 만들 경우 제 능력으로 가능한 작업인지도 고려합니다. 캘리그래피 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도구는 붓이 기본이 되긴 하지만 붓 펜, 젓가락, 돌멩이 등도 다양하게 활용하는데요. 원고 내용과 글자의 성격에 따라 도구를 선택하죠.
또한 장식성이 강한 서체를 사용할 때는 가독성을 해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써요. 서체는 미적인 요소이기도 하지만 전달 매개로서 ‘글자’의 기능에도 충실해야 해요. 그래서 가독성을 위해 서체의 원형을 다듬는 섬세한 조정 작업도 필요해요.
책을 만들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디자인하는 것인데요. 그래서인지 김영민 작가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표지 작업이 기억에 남아요. 기존의 표지와 다르게 새로 표지를 제작하는 리커버 작업이었는데요. 의뢰를 받던 날, 마감 중이라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런데도 팬심이 앞서 1초의 고민도 없이 ‘너무 하고 싶어요!’라고 답변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일러스트가 사용된 기존의 표지와 차별을 두면서 동시에 책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했던 것들이 잘 표현되어 만족했던 작업이었습니다.
▲ 젠트리피케이션 프로젝트 <사라진 것들> ▲ <서울리뷰오브북스> 창간호
저는 달력 프로젝트 <사라진 것들>을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진행했는데요. 이 프로젝트에는 작가 은유, 시인 오은, 뮤지션 요조 등 젠트리피케이션 이슈에 공감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응원을 담았어요.
달력은 페이지마다 하나의 글과 한 장의 사진을 함께 실었는데요. 글의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산문집 느낌이 나도록 디자인과 색상을 구상했고, 포스터나 벽걸이 형태로 사용할 때 글자가 잘 읽힐 수 있도록 큼지막한 볼드체를 활용해 한글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작업물로는 얼마 전 창간된 계간 서평지 <서울리뷰오브북스>의 아트 디렉터로 참여해 만든 작품이 떠오르는데요. 인상적이고 개성 있는 제호 디자인을 만들고자 고민하다가 광화문의 한 서점 출입구 쪽 계단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직렬로 쓰는 보통 잡지의 제목과 다르게
‘다른 배열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조금은 낯설지만 신선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찌라시 상점>은 제가 해외의 미술관, 아트 페스티벌을 다니면서 수집한 전단을 전시한 팝업 스토어 형식의 프로젝트였어요. 전시나 페스티벌에서 배포되는 인쇄물은 디자인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프로젝트의 개성도 강하게 담겨있어 제가 ‘배움의 밭’으로 삼는 자료인데요. 다양한 서체들을 사용한 자료들을 볼 때마다 신기하고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최근 국내에서도 다채로운 한글 서체들이 많이 개발되고 있는데요. 서체와 한배를 탄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개성 있는 정서와 개성을 가진 서체가 늘어나는 것은 작업에 큰 도움이 돼요. 때문에 서체를 개발하는 디자이너들을 항상 열심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점차 다양해지는 한글 서체 덕분에 요즘은 다소 보수적인 출판물에서도 새로운 서체들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요. 신선함과 보는 즐거움이 있는 서체, 편집물을 만나면 저 역시 자극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시도하게 돼요.
늘 고민과 도전을 하게 만드는 실험의 영역이죠. 한글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즐겁게 할 때도 많지만 대체로 어렵다고 느껴요. 편집 디자인에서 타이포그래피는 기본적인 요소이면서 시각물의 인상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거든요. 작품 전체의 균형을 살피면서 그 작품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서체를 찾기 위해 늘 고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