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충청도 청양 남하면에 사는 정씨 여인이
사또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한 한글 청원
(앞면) (뒷면)
자료명: 청양 남하면 정소사 한글 원정
시 대: 1893년 5월
크 기: 81×55cm
소장처: 국립한글박물관
이 자료는 지금으로부터 128년 전인 1893년 5월, 충청도 청양 남하면에 사는 여인 정씨가 공주 지역을 행차하던 수의사또께 홍주 상전면에 사는 양반 한송여・한근여를 처벌해 줄 것을 청원한 한글 소지이다. 문서의 앞뒤에는 정 여인의 청원에 대한 사또의 처결문이 한문 초서체로 함께 적혀져 있다.
정 여인은 지난 달 밤에 당했던 끔찍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나 치욕스럽고 죽고만 싶은 심정이다. 1892년 5월, 남편을 잃고 의지할 곳 없던 정 여인은 어린 자녀 셋을 데리고 늙은 시어머니와 함께 충청도 청양 남하면의 시당숙 집에 의탁하며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정 여인이 그놈들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한 것은 1893년 4월 15일 밤의 일이다. 그날따라 몹시도 고단하고 기력이 없던 정 여인의 처소에 잡류 수십 명이 갑자기 들이닥쳤고 그들은 정 여인을 강제로 가마에 태우려 하였다. 충청도 일대에서 못된 짓을 일삼기로 소문난 홍주 상전면의 한송여・한근여 숙질 일당이었다. 시댁 어른 서넛이 그놈들에게 붙잡혀 가는 정 여인을 구하려고 안간 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 사력을 다해 도와준 덕분에 정 여인은 간신히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한 씨 일당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정 여인의 시댁 어른들은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 여인은 수치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도 없거니와 자신 때문에 상해를 입은 시댁 어른들과 동네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어 목숨을 끊고자 하였으나 시어머니의 만류로 죽지도 못하였다. 정 여인은 죽지 못해 살아가며 그놈들의 처벌만을 간절히 바랐으나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날 일을 주도했던 사람 중 한근여는 청양 옥에 갇혔지만 한송여는 잡히지 않았고, 충청도 일대에서 유가를 도륙하고 과부를 겁탈하는 등 여전히 못된 짓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들렸다. 한송여가 홍주 관속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어 처벌을 피한 탓이다.
정 여인의 괴로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고 억울함을 고할 곳 없는 칠순 시어머니와 정 여인, 정 여인의 어린 자녀들은 밤낮으로 통곡할 뿐이었다. 그날 밤 일이 있고 난 뒤 한 달쯤 됐을까, 공주 지역에 수의사또 행차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정 여인은,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그간에 있었던 억울한 사연을 글로 써서 사또께 소상히 아뢰었다. 한 씨 일당들이 행했던 악행의 진상을 낱낱이 파악한 뒤 두 사람을 법정에 잡아들여 처벌함으로써, 후환을 막고 자신과 같은 이들이 억울함을 풀고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1893년 5월 충청도 공주에 행차했던 수의사또 선무사는 정 여인의 청원에 대해 어떤 처결을 내리라고 지시했을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무사
이러한 일은 소관 법률 부서에서 엄히 다스려야 하는 원칙과 다르므로, 반드시 순영(巡營)에서 엄히 처단할 것이거니와, 한송여 한근여를 엄히 신문하여 법률에 의거 처벌할 것
척재관. 17일.
* 선무사(宣撫使): 조선 시대에, 큰 재해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왕명을 받들어 재난을 당한 지방의 민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 척재관(隻在官): 피고가 살고 있는 지역의 지방관
정 여인이 억울한 일을 당한 지 거의 한 달 만에 피의자들에 대한 처결 지시가 제대로 내려졌다. 한문 초서로 작성된 이 처결문은 본문 중간에 관인을 비스듬하게 찍어 내용의 변조를 막았다. 당시 이러한 청원류는 접수된 소지나 원정 내용의 진위를 파악한 다음, 소정의 절차에 따라 조사하고 판결한 결과인 제사(題辭, 처결문)를 기재하였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를 불러 추문한 다음, 최종으로 결송 결과를 제사로 기재한 문서를 발급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한송여와 한근여 숙질은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매우 궁금하지만 현재로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렇더라도 위의 처결문 내용으로 볼 때 순영(巡營) 담당관들은 한송여의 죄를 알고도 눈 감아 준 홍주 관속들과 달리, 한 씨 일가를 죄값에 따라 제대로 벌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때 여성의 유일한 문자는 한글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에게 소식을 전할 때, 어린 자녀들을 가르칠 때, 중요한 지식을 동시대인과 공유하거나 다음 세대에 전할 때, 일상의 희로애락을 글로 나타낼 때,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의 문자생활을 한글로 하였다. 또한 위 자료의 정 여인처럼 원통한 일이 있어 그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글로써 호소할 때도 여성들은 한글을 사용하였다.
이 글에서 소개한 「청양 남하면 정소사 한글 원정」은, 그와 같은 조선 시대 여성의 다양한 한글 사용 양상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또한 여성의 정절을 여전히 중시했던 조선 시대 말에 용기 있는 한 여성이, 자신이 당할 뻔했던 치욕스러운 일에 대해 꽁꽁 숨기고 혼자 고통을 감내하는 대신, 사또에게 고해 관련자들을 처벌해 달라고 하는 달라진 시대 인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이기도 하다.
국립한글박물관이 2021년에 구입하여 원문 이미지와 글로써 처음 공개하는 「청양 남하면 정소사 한글 원정」은 2021년 10월 새롭게 개편하여 문을 여는 상설전시실에서 실물을 만나볼 수 있다.
판독문
도ᄂᆡ 쳥양 남하면거 뎡쇼ᄉᆞ 원졍 은단
공 감복이 근ᄅᆡ 인심니 무상ᄒᆞ오나 셰양의 홍쥬 상젼 ᄉᆞ옵ᄂᆞᆫ 한반숑여근여 슉질 갓튼 놈니 어ᄃᆡ 잇ᄉᆞ오리가 ᄌᆈ쳡니 팔ᄌᆞ 긔박ᄒᆞ와 쟉연 오월의 상부ᄒᆞ옵고 혈〃단신이오 셰 ᄌᆞ식을 다리고 늘근 시모와 시당슉집의 〃지ᄒᆞ여 근〃이 잔명을 보죤ᄒᆞ옵던니 의외예 거월 십오일 밤의 한숑여근여 슉질 양인니 ᄌᆈ쳡의 고단ᄒᆞ고 한미ᄒᆞ믈 멸시ᄒᆞ여 잡류 슈십 명을 거(ᄂᆞ)라고 ᄂᆡ졍의 드러와 ᄌᆈ쳡을 가마의 시르랴 ᄒᆞ오니 당장 곤욕은 엇지 다 알외니가 슈삼 시죡은 구타을 당ᄒᆞ와 거의 ᄉᆞ경의 이르고 동ᄂᆡ 타인의 구ᄒᆞ물 입어ᄉᆞ오니 셰상의 이러헌 변이 어ᄃᆡ 잇사이가 여루 반명ᄂᆡ 니르ᄒᆞᆫ 욕을 보고 무신 면목으로 ᄉᆞ오니가 일이 차 듁고ᄌᆞ ᄒᆞ되 시모의 구ᄒᆞ고 ᄀᆡ유ᄒᆞ믈로 영읍졀쳐을 바라ᄉᆞᄋᆞᆸ던니 슈도ᄒᆞᆫ 숑여은 근본 홍듀 관쇽으로 친ᄒᆞᆫ 놈이라 영졔로도 잡지 못ᄒᆞ옵고 한근여은 쳥양 옥의 가두워ᄉᆞᆸ던니 근일 한숑여의 욕셜니 류가을 도륙ᄒᆞ고 과부을 겁탈헌다 ᄒᆞ오니 이갓튼 ᄑᆡ류가 어ᄃᆡ 잇ᄉᆞ리가 한가의 악십은 날로 심ᄒᆞ옵고 ᄌᆈ쳡의 곤욕은 시로(실로) 더ᄒᆞ고 고ᄒᆞᆯ 곳 업ᄂᆞᆫ 칠십 시모와 고아과여가 셔로 숀을 잡고 듀야 통곡ᄲᅮᆫ이옵던니 듯ᄉᆞ오니 슈의사도 ᄒᆡᆼᄎᆞ가 공듀 계시다 ᄒᆞ옵기로 연유을 알외오니 복걸 참상이신 후에 한숑여근여 양인을 법졍의 자바 들려 음형ᄒᆞ옵시고 의률 졍ᄇᆡᄒᆞ와 풍화을 바러시고 후환을 막어사 ᄌᆈ쳡 갓튼 잔과로 잔명보죤ᄒᆞ와 듀옵시기을 쳔만 바라나이다
슈의사도 쳐분
게ᄉᆞ오월 일
작성자: 고은숙(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