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영상, 책, 포스터 등 다양한 시각 매체가 발전하면서
이에 발맞춰 가독성은 물론, 개성까지 갖춘 한글 서체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다채로운 한글 서체 중에서도 유독 광고계에서 돋보이는 서체가 있다.
바로 ‘HG꼬딕씨’다.
누구나 광고에서 한 번쯤은 봤을 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HG꼬딕씨’는 김동관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했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한글 서체를 디자인한 김동관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한글씨 작업실 사진 ▲ 한글씨에서 제작한 서체
안녕하세요. 저는 한글씨라는 독립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한글 서체를 만들고 있는 김동관이라고 합니다. 서체 디자이너로서 지금까지 총 10개의 서체 패밀리, 49종의 서체 스타일을 제작했어요.
모든 언어는 각자 자기만의 역사적 흐름이 있으며 한 언어의 서체는 그 언어를 직접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제일 잘 만든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평소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의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한글 서체를 만듭니다.
길거리 혹은 집, 휴대폰 속 영상, 광고, 간판, 패키지 등 주변을 둘러보면 어디에나 글자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체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디자인 작업물의 ‘재료’를 공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디자이너들은 종종 직접 글자를 그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마감 때문에 글자를 일일이 그릴 시간이 부족해요. 서체 디자이너는 그런 디자이너들이 좋은 디자인 혹은 타이포그래피를 만들도록 양질의 서체를 개발해 제공합니다. 더 나아가 사회의 디자인적 아름다움을 향상시키는 역할도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서체 디자인 수업은커녕 타이포그래피 강의조차 찾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저 역시 서체 디자인 분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학교 게시판에서 폰트 회사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는데요. 저는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의 베지어 곡선을 이용한 디자인을 선호한다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이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입사 후 의외로 ‘반복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지구력’과 ‘잘 질리지 않는 성격’ 등 서체 디자이너로서 적합한 성향이 저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회사 업무로 제작한 서체를 제외하고, 제가 처음 제작한 서체는 ‘HG씨앗’이에요. 요즘에는 ‘흘림’이라는 표현이 현대적으로 많이 재해석됐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HG씨앗을 제작하려던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 부분에 도전해봤죠. HG씨앗은 흘림체를 현대적인 가로쓰기용으로 재해석하다 보니 지금 보면 아쉬운 부분들이 조금 있어요. 하지만 제목용으로서 의미 있는 서체 같아요.
▲ 서체 ‘HG꼬딕씨’ ▲ 서체 ‘HG키큰꼬딕씨’
‘HG꼬딕씨’는 2010년대 초반에 누리소통망 속 여러 디자이너의 작업물을 보면서 복고적인 네모꼴 구조의 제목용 고딕 서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개발한 서체입니다. 다만 복고적 느낌을 넘어, 보다 현대적이고 잘 정돈된 서체로 발전시키는 데 집중했어요.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6가지 굵기의 서체로 개발했고, 제작하는 데 반년 이상 걸린 것 같아요. 다른 네모꼴 고딕 서체와 다르게 HG꼬딕씨만이 가지는 특징은 단단한 구조와 현대적인 이응, 인간적인 시옷의 형태가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꼬딕씨라는 이름을 정할 때는 형용사와 명사를 붙이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요. ‘상냥한’ ‘냉정한’ 등의 형용사를 붙이니 서체가 하나의 인격체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에게 쓰이는 호칭 중 하나인 ‘씨’를 붙여봤죠. 이 초기의 아이디어가 발전해서 ‘키큰꼬딕씨’, ‘굴린꼬딕씨’ 등 관련 서체 패밀리 이름으로까지 확장됐어요.
서체를 제작할 때 먼저 일정 기간 시안 작업을 해요. 아이디어가 좋더라도 실행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빨리 접고, 다른 시안을 찾죠. 하나의 서체로 완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어지는 시안이 나오면 산꼭대기에 올라가는 심정으로 완성될 때까지 작업해요.
서체의 특징에 따라 과정은 다르지만, 대부분은 처음에 10자 내외의 씨글자를 섬세하게 그려보고, 이후 여러 문장을 만들며 50자, 100자, 200자로 확대해 나가요. 이 과정에서 새로운 문장들을 통해 다양한 모임의 글자 구조를 정하고 체계를 만들죠. 어색한 형태나 문제점도 찾아 수정합니다. 이때 많은 문장을 확인할수록 이후의 작업이 순조로워요. 이를 토대로 적게는 2,350자, 많게는 11,172자의 글자를 완성하고 이와 어울리는 영문자와 특수문자를 제작해요. 마지막으로 자간과 행간을 살피는 조판 테스트를 통해서 검수하고 정리하죠.
가장 많이 고민하는 점은 ‘널리 쓰일 수 있는 서체인가’입니다. 서체는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양하고 개인의 취향을 많이 타요. 하지만 다수의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서체도 분명히 있죠. 저는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또한 저는 하나의 서체를 제작할 때 온전히 그 서체에만 집중하는 편이며 여러 가지 작업을 함께 진행하지 않아요. 한 벌의 서체를 완성하는 동안 공통된 미적 감각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죠.
욕심을 줄여야 해요. 한 가지의 단순한 특징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서체 디자인은 눈에 쉽게 보이지 않는 특징 몇 가지를 모든 글자에 녹여내야 자연스러워지는데요. 결국 서체 디자인은 정교함의 마법이에요. 잘 정돈된 글자들이 하나의 서체로 모였을 때 놀랍게도 대중들은 좋은 서체라는 것을 알아내죠.
▲ <백상예술대상>에서 사용된 ‘HG백야’
▲ ‘장기하와 얼굴들’
공연 포스터에 사용된 ‘HG꼬딕씨’
방안에서 만들어진 제 서체들이 실제로 바깥에 나가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해요. <백상예술대상>에서는 HG백야가,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연 포스터에는 HG꼬딕씨가 사용됐는데요. 이처럼 제가 좋아하거나 관심 있게 보던 매체에서 제 서체가 사용된 것을 보면 ‘내가 하는 일이 의미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특히 HG꼬딕씨는 감사하게도 대부분의 시각디자인 분야에서 다채롭게 사용됐는데요. 요즘에는 영상 광고나 유튜브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 같아요. 같은 서체라도 업계마다 유행한 시기, 사용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서 재미있었어요. 각 미디어 성향에 맞게 사용하기 위한 디자이너들의 고민 덕분이겠죠.
▲ 2019 타이포잔치-
다국어 활자 숲 ‘인문명조’
▲ 2019 타이포잔치-
배리어블 폰트 ‘버섯’
▲ 2020 세계한국어대회-
50인 50꼴 ‘산티아고’
저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제 일상은 단순하게 아침에 일어나 방에 앉아 글씨를 그리는 것뿐이거든요.
다만 그동안 열심히 일한 덕분에 좋은 분들의 도움으로 규모 있는 전시회에 여러 번 제 작품을 보여드린 경험이 있어요. 특히 <타이포잔치> 같은 전시는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행사인데요. 그곳에 제 이름이 들어간 적이 있어요. 그때 디자이너로서의 목표를 하나 이룬 느낌이었죠.
한글 서체는 영문 서체보다 필요한 글자 수가 많은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작업량의 차이가 있어서 덕분에 너무 힘듭니다. (웃음) 그래도 한자를 그리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위안 삼아요.
디자인적인 차이라면 영문은 비교적 곡선적인 요소가 많고 한글은 직선적인 요소가 많아요. 펜글씨에서 발전한 영문과 붓글씨에서 발전한 한글은 유전자 자체가 달라서 영문 서체의 표현을 한글에 그대로 적용하면 어색한 경우가 매우 많아요.
기존 폰트 회사에서 약 5년을 근무한 뒤, 2013년에 독립해 1인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인 한글씨를 만들게 됐어요. 제 작업 성향을 판단했을 때, 혼자서 하나의 폰트를 제작하는 편이 저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단 1인 서체 디자인 스튜디오의 길을 꿋꿋하게 가려고 해요. 물론 인생은 모르는 일이라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요.
현재 저는 ‘시선들’이라는 서체 패밀리를 제작하고 있어요. 손글씨를 기반으로 한 산세리프 서체인데요. 한 개의 굵기가 마무리된 상태이고 5종의 서체로 구성된 패밀리로 제작할 계획이에요. 더불어 앞으로 계속 제가 만들고 싶은 서체를 만들면서 삶을 지키고 지속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