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고 빠른 것을 추구하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는 곳이 있다.
바로 납 활자를 이용한 활판 인쇄술로 책을 찍어내는 ‘활판공방’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날로그식 인쇄방식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박한수 대표가 있었다.
활판공방을 운영하며 활판인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박한수 대표와 한글 활판인쇄의 매력에 관해 이야기 나누어 보았다.
안녕하세요. 활판인쇄로 책을 만들어 출판하는 활판공방의 대표 박한수입니다. 저는 20년간 박물관 도록을 디자인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100여 년 전 우리나라 고유 활판인쇄 문화에 관심을 두게 됐는데요. 그 때문에 지금은 파주출판도시에서 국내 유일하게 활자를 만들어 책을 출판해 활판인쇄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활판인쇄 관련 기계들
저는 첫 직장 생활을 정병규출판디자인에서 북 디자이너로 시작했습니다. 디자인 일을 하면서 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활자’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달았죠. 그래서 대학원에 들어가 활자를 전공했습니다.
그러던 중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주요 나라에서 문학 전집, 사상전집, 중요 국가기록물을 여전히 활판인쇄 방식으로 제작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요. 이에 감동을 하여 흥분을 감출 수 없었죠. 그래서 서울부터 제주도까지 전국을 돌며 활판인쇄소를 찾았지만, 국내에서는 이미 다 사라지고 난 뒤였습니다. 이때부터 활자주조기, 인쇄기와 기술자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2007년에 활판공방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 주조하는 모습 ▲ 문선하는 모습 ▲ 조판하는 모습 ▲ 인쇄하는 모습
▲ 자모 ▲ 활자 원도
활판인쇄는 순서대로 주조(鑄造), 문선(文選), 조판(組版), 인쇄(印刷), 제본(製本) 과정을 거쳐 책을 만듭니다. 먼저 ‘주조’는 활자를 만드는 작업인데요. 활자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자모를 주형에 넣은 뒤 350도로 녹인 납을 주입해 활자를 제작합니다. 만들어지는 양은 활자의 크기마다 다르지만 8포인트 글자 기준으로 1시간에 약 7,130자가 만들어집니다. 주조되는 다양한 서체 중 활판공방은 명조체, 고딕체, 해서체, 궁서체 네 종류의 활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다음 과정인 ‘문선’은 만들고자 하는 책의 원고를 보고 활자를 하나하나 골라내어 모으는 작업으로 ‘채자(採字)’라고도 합니다. ‘조판’은 문선공이 골라 뽑은 활자를 이용해 인쇄 원판을 짜는 작업입니다. 글자를 심는 작업이라고 하여 ‘식자(植字)’라고도 해요. 교정이 완료되어 조판이 끝나면 인쇄기에 완성된 조판을 올려놓고 종이에 찍어내는 ‘인쇄’ 작업을 합니다. 인쇄 후에 인쇄물을 하나로 엮는 ‘제본’ 작업을 끝으로 한 권의 책이 완성되죠.
▲ 활판공방에서 제작한 출판물들 ▲ 활판공방 체험장면
박목월, 서정주, 이육사 등 이미 돌아가신 문인들의 대표작을 비롯해 현재 활동 중인 문학인의 작품을 책으로 만듭니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직접 뽑은 문학성 짙은 작품만 모아 단행본으로 엮어 한국문학 대표 시선집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시선집은 독자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애장본으로서, 대량 생산하지 않고 소장가치가 있는 한정본으로만 발행됩니다. 이외에도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 언해본》, 《직지심체요절》, 《오륜행실도》, 《천로역정》과 같은 책을 전통제본 방식으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활판공방에서는 출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종이와 활자문화에 친숙해지도록 재미있는 놀이와 결합한 체험 행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다양한 연령대가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는데요. 직접 쓴 짧은 20~30자 원고로 활판인쇄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비롯해 목판인쇄와 근대 인쇄를 비교해보는 ‘인쇄의 변천사’, ‘활판인쇄로 명함 만들기’ 등 10여 가지 체험 행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활자로 책을 찍어내는 모습 ▲ 활자로 찍어낸 책
오프셋 인쇄가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이라면, 활판인쇄는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행간과 여백을 치밀하게 계산해 찍어내는 활판인쇄는 종이책만이 갖는 특징을 한껏 살려주는데요. 독자는 활판인쇄를 통해 요철(凹凸)과 우둘투둘한 엠보싱의 감촉을 느낄 수 있죠. 이는 밋밋하고 끝없이 지루한 아스팔트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발바닥 감촉이 유별난 시골의 자갈길을 천천히 걷는 기분을 주게 됩니다.
아날로그는 ‘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기밥솥에서 지은 밥맛과 가마솥 밥맛이 다르듯이, 그 고유한 맛은 도구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같은 도구로 요리를 하더라도 재료에 따라 또 맛이 다른데요. 커피로 치면 원두의 품종, 물의 온도, 바리스타의 기술, 심지어 커피잔의 품격에 따라 저마다 특유한 커피의 맛과 향을 내죠.
활판인쇄도 똑같아요. 종이라는 물성 위에 사용되는 활자의 크기, 간격, 활판 잉크 등 다양한 재료들에 따라 활판 인쇄물은 각각의 특징을 가집니다. 이처럼 일반 책들과는 다른 활판인쇄만의 매력을 찾기 위해서는 관심과 노력이 필요해요. 납 활자로 인쇄된 종이책을 읽으면서 꿈을 이루고자 수많은 밤을 뒤척였던 지난날의 추억을 떠올려 본다면 활판인쇄에 다시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활판공방의 장인들은 평균 89세이십니다. 다들 연세가 많으셔서 최대 5년 이상은 작업을 더 못하실 것 같아요. 저에게는 이 기간 안에 활판인쇄 기술을 젊은 세대에게 전승하는 것이 큰 과제입니다. 한편으론 활판인쇄 시설과 기술자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방안을 제시해 활판인쇄의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 활판인쇄의 명맥이 끊기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 나란히 진열된 활자들
저에게 활자란 대기 속의 공기와도 같습니다. 공기가 오염이 되면 인간이 살 수 없듯이 활자 환경이 오염되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고 생각해요. 또한 서체에 있어 좋은 서체란 맑은 유리 창문이 바깥 풍경을 있는 그대로 잘 전달하는 것처럼 글의 내용을 그대로 잘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글의 의미는 세종대왕님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이후 최초의 한글금속활자 인쇄본인 국보 제320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 잘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