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웃음 참여 행사

  • 분홍색과 살색, 연한 초록색 등으로 이뤄진 배경이 있다. 가운데 하단에서는 여자 1명과 남자 1명이 서로를 마주보며 각자 한쪽 손을 들고 있다. 그 위에 남성 1명이 있다. 가운데 왼쪽에 여자 1명, 오른쪽에 남자 1명이 있다. 여자는 왼손을 들고 손을 펼치고 있다. 남성은 오른손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가운데 상단 왼쪽에는 남자 1명, 오른쪽에는 여자 1명이 자리하고 있다.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다. 참여 행사 어디 사투리일까요?
    나도 사투리 왕!
  • 한박웃음
    소식지의 이름 ‘한박웃음’은
    2018년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름으로
    ‘함박웃음’에서 착안한 이름입니다.
    ‘한박웃음’에서 ‘한박’은 국립한글박물관을
    의미합니다.
    ‘한박웃음’의 글씨는 ‘민체民體’로 유명한
    여태명 교수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 한박웃음
    소식지의 이름 ‘한박웃음’은
    2018년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름으로
    ‘함박웃음’에서 착안한 이름입니다.
    ‘한박웃음’에서 ‘한박’은 국립한글박물관을
    의미합니다.
    ‘한박웃음’의 글씨는 ‘민체民體’로 유명한
    여태명 교수님께서 만들어주셨습니다.
소장품 이야기 사진. 오른쪽에 국문연구의정안의 한 페이지가 있다. 살구색 종이에 한자와 한글이 섞여 있고, 세로로 쓰였다. 곳곳에 도장이 찍혀 있다. 페이지 오른쪽 가운데 부분이 끈으로 묶여 있다. 끈의 왼쪽에 검은색 자국이 있는데, 세로로 이뤄져 있다. 배경은 회색이다.

소장품 이야기 오늘날 한글 맞춤법의
토대가 된 《국문연구의정안》

《국문연구의정안》은 혹한의 시련 속에서도 피어난
인동초(忍冬草)와 같은 존재

- 한동완, 『국문연구의정안』, 신구문화사, 2006. 머리말 중에서

하늘색 폴더 그림이 있고, 그림 왼쪽 상단에 ‘현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기초가 되다 <<국문연구의정안>>이란?’이라고 적혀 있다. 그 밑에 또 다른 그림이 있다. 살색 배경이고, 그림의 왼쪽에는 국문연구의정안의 그림이 있다. 한자가 세로로 적혀 있다. 오른쪽에는 국문연구의정안의 의미가 쓰여 있다.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安)》은 1909년 9월 학부(學部)*내에 설치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가 국어 맞춤법 제정을 위해 음운과 철자법을 연구하여 제출한 보고서로 국어정서법을 마련하기 위한 국가적 사업의 결실이자, 현대 한글맞춤법통일안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학무행정(學務行政)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으로 1894년 예조의 소관 업무를 계승한 학무아문(學務衙門)을 1895년부터 학부로 칭하였다. 현재의 교육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통일된 문자 체계 확립을 위해 학부대신 이재곤의 청의로 1907년 7월 8일 학부 안에 설치된 한글연구기관이다.

報告書

本所에셔國文硏究ᄅᆞᆯ終了ᄒᆞ얏ᄉᆞᆸ기硏究案을添附ᄒᆞ야의정안을
제출ᄒᆞᄋᆞᆸ고事業의顚末을左開ᄒᆞ와玆에報告ᄒᆞ오니
照亮ᄒᆞ심을望홈

隆熙三年十二月二十八日

國文硏究所委員長尹致旿
幹事 李海應

學部大臣李容稙 閣下

左開

《국문연구의정안》 첫째 면의 기록을 보면, 국문연구소의 국문연구 결과인 연구안을 1909년 12월 28일 위원장 윤치오, 간사 이해응이 학부대신 이용직에게 제출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의정안을 포함한 연구안 등이 완료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펼쳐진 책이 있다. 양 페이지에 걸쳐 한글과 한자가 세로로 쓰여 있는데, 국문연구의정안 첫째 면의 내용이다. 의정안 제작을 위한 과정, 연구위원들, 연구 목적 등이 적혀 있다. 왼쪽 페이지에 빨간색 박스로 표시된 글씨가 있다.

事業은國文의原理와沿革과現在行用과將來發展等의方法을硏究ᄒᆞ
기로目的ᄒᆞ와國文全體中硏究ᄒᆞᆯ만ᄒᆞᆫ材料ᄅᆞᆯ揀出ᄒᆞ야十題에分ᄒᆞ야
硏究ᄒᆞᄃᆡ 委員長이問題를提出ᄒᆞ거든各委員이硏究案을提出ᄒᆞ고
其硏究案을謄寫配付ᄒᆞᆫ後議案을討論ᄒᆞ야標題法을議決호ᄃᆡ 問題
ᄂᆞᆫ每回會議에 提出ᄒᆞ야鱗次硏究홈

또한 의정안을 제작하기 위한 과정, 연구위원들, 연구 목적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구 회의는 1907년 9월 16일부터 1909년 12월 27일까지 총 23회 개최하였으며, 10개의 주요 문제에 대하여 토론하고 논의를 거쳐 《국문연구의정안》과 8명 위원의 연구안 총 4책을 별첨하여 제출하였다.

*1907년~1909년 기간 중 위원들은 임명, 해임 등 변화가 있고 최종위원 8인은 어윤적, 이능화, 주시경, 권보상, 송기용, 지석영, 이민응, 윤돈구이다.

왼쪽에는 국문연구의정안의 2제를 기록한 14번째 면의 내용이 있다. 책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펼쳐졌고, 양 페이지에 걸쳐 한글과 한자가 세로로 적혀 있다. 각 페이지에 ㆁ,ㆆ, △, ◇ 등의 글자도 섞여 있다. ▲ 2제를 기록한 열 번째 면

오른쪽 사진은 국문연구의정안의 7제와 8제를 기록한 13번째 면이다. 책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펼쳐져 있다. 양 페이지에 걸쳐 한글과 한자가 세로로 적혀 있다. ㄱ과 ㄴ, ㄷ, ㄹ, ㅁ, ㅂ, ㄲ, ㄸ, ㅃ, ㅆ, ㅉ 등이 유독 검은 글씨로 쓰여 있다. ▲ 7제와 8제를 기록한 열세 번째 면

의정안을 제작한 목적은 당시 국문, 즉 한글의 사용이 빈번해짐에 따라 제각각으로 사용되거나, 국문의 원리와 연혁과 현재 행용과 장래 발전 등의 방법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연구 주제는 10개의 문제로 나눈다고 하였다. 10개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① 국문의 연원과 자체 및 발음의 연혁
② 초성 가운데 ㆁ,ㆆ, △, ◇ , ㅱ, ㅸ, ㆄ, ㅹ 여덟 자의 다시 사용할지에 관한 여부
③ 초성의 된소리 표기를 ㄲ, ㄸ, ㅃ, ㅆ, ㅉ, ㆅ 여섯 자로 정할지 여부
④ 중성 중 ‘ · ’자 폐지와 ‘=’자 창제 여부
⑤ 종성의 ㄷ, ㅅ 두 자의 용법과 ㅈ, ㅊ, ㅋ, ㅌ, ㅍ, ㅎ 여섯 자도 종성에 통용할지 여부
⑥ 자모의 7음과 청탁의 구별 문제
⑦ 사성표를 사용할지 여부와 국어음의 고저를 표기할지 여부
⑧ 한글 자모의 명칭을 정하는 문제
⑨ 자순과 행순을 정하는 문제
⑩ 철자법

이러한 국문연구소의 연구 결과는 현행 한글 맞춤법에 직간접적으로 접목된다는 큰 의의가 있다. 특히 현행 한글맞춤법이 모든 초성을 종성에 사용하는 받침 규정은 의정안 제 5제에서 의결하고 있는 규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하늘색 폴더 그림이 있고, 그림 왼쪽 상단에 ‘현재 일본에 있는 <<국문연구의정안>> 원본 그 이유는?’이라고 쓰여 있다. 그 밑에 또 다른 그림이 있다. 노란색, 주황색, 파란색 등의 문양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가운데 상단에 ‘1910년 8월 대한제국 국권 상실’이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한국어 연구자인 오구라 신페이,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편수서기로 임명되며 한국어 연구를 위해 기초 자료 수집’이라고 나와 있다. 가운데 하단에는 ‘오구라 신페이가 소장하던 <<국문연구의정안>>은 그의 사후 도쿄대학교에 기증’이라는 문구가 있다.

도쿄대학교 오쿠라문고의 소장 자료로 등록된 국문연구의정안의 사진이 있다. 종이는 살색이고, 왼쪽 상단에 국문연구의정안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세로로 쓰였다. 오른쪽 하단에는 도장이 찍혀 있는데, 도장 주위를 빨간색 박스 모양이 감싸고 있다. 도장 아래 ‘L 174625’라는 등록 번호가 적혀 있다. ▲도쿄대학 오구라문고 장서인

‘아쉬운 점은 동경대학교 오구라 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국문연구의정안》의 원본을 직접 대면하지 못한 채
1970년에 나온 <개화기의 국문연구>의 부록 영인본으로 역주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완,『국문연구의정안』, 신구문화사, 2006. 머리말 중에서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국문연구의정안》은 왜 공표되지 못하였을까? 시기적으로 고종퇴위와 순조 즉위, 정미7조약 체결, 신문지법, 보안법, 군대 해산령 공표 등 실질적으로 국권 상실을 목전에 둔 시대였으며, 친일파였던 학부대신 이용직이 행정적으로 지연했으리라 추측되는 상황들로 인해 공표되지 못했다고 추측할 뿐이다. 결국 1910년 8월에는 대한제국이라는 나라 이름도 국문연구소도 없어지게 되었다.

현재 《국문연구의정안》의 원본은 일본 도쿄대학교(東京大學敎) 오구라문고(小倉文庫)에 소장자료로 등록되어 있으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네 번째 면에 오구라문고의 장서인과 등록번호가 찍혀있다. 오구라문고에는 한국어 연구자인 오구라 신페이(小倉 進平, 1882~1944) 사후 그가 기증한 자료들이 있는데, 15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한글 자료 및 구결 자료가 많고, 한국 개화기의 국문 연구 자료가 있으며, 그중 하나가 바로 《국문연구의정안》인 것이다. 그럼, 왜 국문연구의정안 원본을 오구라 신페이가 소장하고 있었던 것인가?

오구라 신페이는 1911년 6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편수서기로 임명되었다. 총독부에 근무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으며, 1919년에는 총독부 편수관이 되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어 연구를 위해 많은 기초자료를 수집하였다고 하며, 국문연구의정안 역시 그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늘색 폴더 그림이 있고, 그림 왼쪽 상단에 ‘‘100대 한글 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국문연구의정안>>의 복제본을 제작하기까지’라고 적혀 있다. 그 밑에 또 다른 그림이 있다. 하늘색이 배경이고, 회색 점이 찍혀 있다. 가운데에 왼쪽과 오른쪽으로 펼쳐진 국문연구의정안의 내용이 자리 잡고 있다. 오른쪽 하단에 하얀색 가운을 입은 캐릭터가 돋보기를 들고 책의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다. 왼쪽 상단에도 하얀색 가운을 입은 캐릭터가 있는데, 안경을 쓴 채 왼쪽 엄지를 들고 오른손에는 휴대폰을 쥐고 있다.

《국문연구의정안》은 2002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100대 한글 문화유산’ 중 하나로 2014년 국립한글박물관 개관 당시부터 오구라 문고로부터 원본 대여 내지는 복제품 제작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국내 보유하고 있는 관련 자료로는 규장각에 흑백 마이크로필름이 있으며,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연구소에서 디지털 이미지가 있다. 일본 도쿄대학교(東京大學敎) 오구라문고(小倉文庫)에 소장자료로 등록된 것이 유일본이다. 이에 2017년 국립한글박물관에서는 향후 전시, 연구자료로 활용하기 위하여 현상 복제본을 제작하였으며, 이 또한 국내 유일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문연구의정안》의 복제는 도쿄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과의 후쿠이 레이(福井玲) 교수의 도움을 받아 진행할 수 있었다. 자료를 처음 실견하였을 때의 감동은 7년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원본 자료는 원래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포갑(包匣)에 쌓여 소중하게 보관 중이었다. 일반적인 서책에서 볼 수 있는 표지는 없었으며, 지정(紙釘)으로만 묶여 있었다. 기본적인 서지사항으로는 본문은 국한문혼용체이고, 세로쓰기로 되어 있다. 보고서 공문 3장, 필사로 된 의정안 11장, 유인으로 된 의정안 10장, 의결록, 4장 ㄱㄷㅂㅅㅈ 5글자의 종음서법일정 1장으로 총 2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첨으로는 의원들의 연구안 4책이 묶여 있다.

국문연구의정안 자료 실견 및 실사 촬영 사진이 있다. 2장으로 이뤄져 있다.

                                    왼쪽 사진의 왼쪽에는 여자 1명이 있고, 오른쪽에는 남자 1명이 있다. 여자가 장갑을 낀 손을 책상 위에 있는 책에 두고 있다. 남자는 책의 내용을 응시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의 가운데 하단에 국문연구의정안이 놓여 있고, 한 남자가 허리를 숙인 채 카메라로 책을 촬영 중이다. 남자의 옆에는 카메라 삼각대와 카메라 가방 등이 있다. ▲ 후쿠이 레이 교수 면담, 자료 실견 및 실사 촬영

▲ 후쿠이 레이 교수 면담, 자료 실견 및 실사 촬영

복제는 원본과 최대한 동일한 형태 및 재료로 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현상복제* 하였다. 세부 과정으로는 실사 촬영, 세부 색 비교, 지질 조사 등으로 진행되었다. 실사촬영은 복제본의 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영인 복제가 가능한 고화질(6,000만 화소 이상 향후 도록, 영인본, 연구자료 활용이 가능함.) 촬영을 진행하였으며, 촬영 시 빛, 공기 노출 등에 의해 원본 자료 손상을 하기 방지하여 빠른 시간에 진행하려고 노력하였다. 본 형태 및 세밀한 부분과 색감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중첩되게 촬영하고 명문․장식과 같은 부분은 접사 촬영하였다. 글씨 부분의 Black, 광곽(變亂 匡廓), 인장 부분의 Red 계열에 대한 색 분석과 색 맞춤은 최소 3회 이상 실시하여, 원본과 가장 유사한 출력물을 선정하여 제작하였다.

*현상복제는 원본의 현 상태를 형태와 재료적인 측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법이며, 원형복제는 자료의 최초 형태를 유추하여 제작하는 방법이다.

국문연구의정안의 두께를 측정하고 지질 분석 접사 촬영을 하는 사진이 있다. 총 2장이다.

                                    왼쪽 사진에 국문연구의정안이 있다. 한자와 한글이 세로로 적혀 있다. 한 사람이 두께를 재는 도구를 책의 옆에 끼워 두께를 재고 있다. 책의 앞쪽에는 줄자가 있다. ▲ 두께 측정

오른쪽 사진에 국문연구의정안이 있고, 한글과 한문이 세로로 쓰여 있다. 한 사람이 책의 내용을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다. 책의 왼쪽에는 사물의 두께를 재는 도구가 놓여 있다. ▲ 지질분석 접사촬영

복제품 제작에 사용되는 한지의 샘플은 사전에 최대한 여러 가지를 준비하여 비교자료를 만들었다. 다른 재료 역시 최대한 동일하거나 유사한 재료로 제작하기 위하여 자료의 길이·두께·무게 등을 정확히 측정하여 복제에 필요한 도면을 작성하여 자료의 현 상태, 색상 등을 관찰하고 컬러 표를 제작해 실제 유물과 동일한 색상을 낼 수 있도록 기록하였다.

종이의 경우 순수한 닥섬유 한지는 아닌 것으로 분석되었다. 또한 시기적으로 국내에서 생산된 종이보다는 일본에서 생산된 종이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였으며, 1900년대 초 종이 종류를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는 도쿄소재 오즈와시 사료관(小津和紙, 小津史料館)*을 통해 사전에 많은 종류를 수집하여 준비할 수 있었다. 실제 복제본은 분석 결과를 토대로 국내에서 맞춤 제작한 한지를 사용하였다.

*1653년 창업, 東京都 中央区 日本橋本町 소재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생산되는 닥, 대나무, 감피 등의 재료로 만든 수제 종이 대부분을 취급하고 있다. 일본 종이의 역사와 재료, 제작 방법, 종류별로 전시하는 사료관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일본 종이의 정보 및 샘플 제공, 향후 근대기 한국 출판물과 관련된 종이 정보 및 샘플 제공 가능

국문연구의정안을 기초로 진행한 비교 작업 사진이 있다. 사진은 총 4장이다.

                                    왼쪽 상단 사진은 바탕종이의 종류를 비교하는 작업을 담고 있다. 가운데 하단에서 국문연구의정안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펼쳐진 채로 놓여 있다. 책의 위에 6장의 종이가 세로로 놓여 있는데, 각각의 종이는 서로를 덮고 있다. ▲ 바탕종이 종류 비교

오른쪽 상단 사진은 기존 자료와 비교 결과를 기록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의 가운데에 한글과 한자가 세로로 적힌 옛 책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 한자와 한글이 세로로 나와 있는 옛 책의 한 페이지가 있다. 오른쪽 하단에는 한 사람의 두 손이 나와 있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고 있다. ▲ 기존 자료 비교 기록

왼쪽 하단의 사진은 바탕종이 색을 비교하는 작업의 한 장면이다. 왼쪽에 국문연구의정안의 한 페이지가 있고, 오른쪽에는 천이 있다. 천 아래에는 하얀 종이가 놓여 있다. ▲ 바탕종이 색 비교

오른쪽 하단의 사진은 광곽, 주선 색을 비교하는 모습이다. 사진의 왼쪽 상단에서 국문연구의정안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빨간색 계통의 색들이 박힌 컬러 표가 놓여 있다. ▲ 광곽, 주선 색 비교

최대한 원본의 원형과 역사성을 재현하기 위하여 직접 실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국권상실이라는 암울하고 불행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우리말과 글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진행하여 이루어낸 연구 결과물인 《국문연구의정안》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으며, 언젠가는 복제본이 아닌 유일본을 전시실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진희(기획운영과 학예연구사)

04383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9 국립한글박물관
대표전화 02-2124-6200, 단체 관람 02-2124-6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