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로 꼽을 만큼 찬란한 함께해(海)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이 많은 이들을 다산초당과 영랑생가로 불러들였던 90년대 이후 오랜만에 찾은 강진은 여행객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내어주려고 하는 인심 좋은 주인장 같았다. 그 사이 ‘가우도’라는 매혹적인 자산을 얻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우도(도암면 신기리)는 움푹 팬 강진만의 두 다리 사이에 낀 작은 섬이다. 생김새가 소(牛)의 멍에(駕)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8개의 섬 중 하나, 그저 ‘풍경’에 불과했던 가우도의 문이 열린 건 두 개의 다리가 생기면서부터다. 대구면 쪽 저두 출렁다리와 도암면 쪽 망호 출렁다리가 양쪽에서 놓이면서 섬은 강진만 양쪽에 어깨를 두른 모양새가 됐다. 도보 여행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다음, 특산물을 파는 노점들과 폐품으로 만든 물고기 조형물을 지나면 곧바로 저두 출렁다리 위에 서게 된다.
다리가 움직일까 긴장된 마음으로 조심스레 발을 디뎌보지만 사실 이름만 그러할 뿐 실제 출렁이는 건 바닷물이다. 물고기 배처럼 중간이 불룩 솟아있는 바닥과 소뿔 모양의 교각이 인상적인 출렁다리 중간에는 쉼터와 함께 강화유리로 된 투명바닥 구간이 있어, 강진만의 물살을 발아래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해준다.
섬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건 ‘향기의 섬’이라는 멋스러운 한글 타이포와 함께 가우도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인 ‘함께해(海)길’ 안내 표지판이다. 해안을 따라 걷는 ‘함께해(海)길’ 오른쪽은 나무 데크로, 왼쪽은 흙길로 이뤄져 있으며, 어느 길을 택하든 넉넉잡아 1시간 반이면 제자리로 올 수 있다. 남도의 자연은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허락한다. 후박나무와 동백나무의 초록빛을 머금은 숲, 그리고 은빛 찬란한 바다 사이를 가르는 나무 데크를 걷는 길은 ‘인생길’로 꼽을 만큼 멋지다.
일제 강점기, 아름다운 우리말을 시어(詩語)로 지켜낸 영랑
여행객들이 유난히 북적대는 곳은 ‘영랑쉼터’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동백닙에 빗나는 마을’ 등 누구나 한 구절쯤 외우고 있을 법한 시구들이 나무 조각에 옛말 그대로의 한글로 새겨져 있다. 벤치에 앉아 훈남의 미소를 짓고 있는 영랑의 동상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다. 서정시인, 순수시인으로 알려진 영랑 김윤식은 일제 강점기에 아름다운 우리말을 영롱한 시어로 지켜낸 시인이다. 하지만 영랑이 독립운동을 이끌다 옥고를 치르고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 삭발령 등을 거부하는 등 일제의 탄압에 지조를 굽히지 않은 민족시인이었다는 점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 한편, 섬 반대편에서는 ‘다산 정약용 쉼터’를 만날 수 있다. 쉼터에는 다산의 큰아들 학현이 유배 온 아버지를 찾아 200여 년 전 겨울 이맘때 강진으로 찾아온 장면을 재현한 조형물이 있다. ‘벼슬을 하지 않아 자식들에게 남겨줄 게 없지만, 대신 근(勤)과 검(儉)이라는 두 글자를 부적처럼 소중히 하라’던 다산의 강직한 부정이 시대를 거슬러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슬렁슬렁 섬 반 바퀴를 돌아 만나는 곳은 선착장과 가우도 마을, 그리고 망호 출렁다리다. 강진의 8개 섬 가운데 유일하게 유인도인 이곳에는 14가구가 산다. 마을식당과 낚시터, 매점 등 편의시설 중 가장 붐비는 곳은 바로 황가오리빵 굽는 집이다. 강진에서 나는 쌀과 단호박으로 반죽을 한 다음 팥소를 넣고 가오리 모양 틀 안에 넣어 구워 만든 빵으로, 노르스름한 빛깔에 절로 군침이 고인다. 한때 가우도의 특산물이었다가 지금은 어획량이 크게 줄어 한여름에나 맛볼 수 있다는 실제 황가오리 대신 빵이 유명세를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갯가의 먹거리가 빵 하나뿐이겠는가. 돔, 전어, 조기를 잡는 어부들과 바지락 캐고 낙지를 잡는 해녀들이 오랜 터전을 잡고 살아온 곳인 만큼 마을식당에서는 바지락, 석화, 꼬막, 낙지, 해삼, 멍게 등 직접 잡은 싱싱한 해산물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흙 내음과 후박나무숲 맑은 공기에 몸과 마음을 씻고
가우도 선착장을 조금 지나면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만난다. 마을에는 키 낮은 담장, 알록달록한 지붕을 머리에 인 섬사람들의 집이 한옥 펜션과 뒤섞여 있고, 집 뒤로는 대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마을 끝자락엔 이 대나무 숲이 만들어낸 초록빛깔 동굴이 있는데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후박나무 군락에 다다를 수 있다. 200여 그루의 후박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선 숲길을 밟을 때마다 올라오는 흙 내음과 푸른 잎사귀에서 뿜어 나오는 피톤치드는 몸과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해 준다.
이 등산로를 따라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면 25m 높이 6층으로 이뤄진 거대한 청자 모양 타워 전망대와 마주한다. 쪽빛 바다와 한 몸인 듯 잘 어울리는 옥빛 청자타워 겉면은 2만 3천여 장의 푸른색 타일이 붙어있는데, 타일 한 장 한 장에는 사람들이 직접 새겨 넣은 꿈과 소망의 메시지와 그림이 알알이 박혀있다.
또한, 청자타워 꼭대기에서 도암면 주변의 바다와 산, 섬 전체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와 함께 ‘하늘길’이라 불리는 짚트랙의 출발지점이 있다. 가우도 섬과 내륙을 연결하는 기다란 쇠줄에 매달린 채 1km 정도를 비행하는 짚트랙은 마치 바다에 곤두박질치는 듯한 공포를 주지만, 30분 넘게 되돌아와야 할 도보 길을 단 1분으로 줄여주는 편리함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KTX도 없이 버스로만 서울에서 4시간 반여를 달려야 닿는 남도의 끝 강진, 그리고 가우도. 유배를 보낼 만큼 머나먼 오지였다지만, 이곳의 바람과 숲, 바다와 햇살은 영랑의 시를 만들고 다산의 철학을 농익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세상사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너른 마음을 가진 바다와 한결같이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푸른 가우도 섬에 마음의 짐을 내려둔 채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에 복귀하는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여·행·가·이·드
가우도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월곶로 473
주변 먹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