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나누기 기획기사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해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으며 수많은 외신에 알려져 우리 민족의 간절한 독립 의지를 대대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집결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본격적인 독립활동에 나서게 된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이를 기념하고자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테마전 <독립운동의 힘, 한글>을 개최한다.
새로이 마련된 상설전시실 내 테마전시 <독립운동의 힘, 한글>
<독립운동의 힘, 한글>전은 2월 25일에 개막해 오는 6월 30일까지 이어지는 상설 전시다.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된 한글의 가치를 조명하고 역경 속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켰던 선조들의 수많은 노력을 소개한다. 전시는 ‘한글, 나랏글이 되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 ‘한글, 독립운동의 힘이 되다’로 구성돼 있다.
한글, 나랏글이 되다
1894년 한글은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가 됐다. 당시에는 우리말글의 규범이 없었기 때문에 한글 표기에 혼란이 있었다. 이에 한글 표기법을 통일하고자 1907년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주시경(周時經, 1876~1914) 등 연구위원들이 1909년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을 제출했으나, 1910년 나라를 빼앗기면서 시행되지 못하였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
3·1운동 이후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주시경의 제자들은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자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였다.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우리말글의 규범 제정하고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우리말과 글의 체계를 세우고 보급하여 한글의 중요성을 알렸다.
• 가갸날에서 한글날로
조선어연구회는 한글 반포를 기념하고자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했다. 당시는 ‘한글’이라는 명칭이 보편화되기 전이었으며, 한글 학습법인 ‘가갸거겨…’에서 착안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어 1928년에는 ‘한글’이라는 명칭을 확산시키기 위해 ‘한글날’로 이름을 바꿨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인 양력 10월 9일을 한글날로 지정했다.
• 한글의 정리와 통일
일제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세 차례에 걸쳐 한글 표기를 통일하려 했으나 시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조선총독부가 세 번째로 시도한 1930년의 「언문철자법」에 주시경의 제자들이 참여하면서 한글 연구 성과를 일부 반영할 수 있었다. 우리 손으로 한글을 정리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등 우리말글의 규범이 탄생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조선어학회의 회의 허가를 지연시키거나 회의를 감시하는 등의 방해 공작을 펼치기까지 했다.
• 한글, 바르게 씁시다
1920~30년대 조선어학회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언론사는 대중을 가르쳐 계몽시키기 위해 한글 보급 운동을 진행했다. 장지영(張志暎, 1887~1976)은 조선일보 지방부장, 교육부장 등을 수행하며 방학동안 귀향하는 학생들이 농민들에게 한글을 보급하도록 지도했다. 이윤재(李允宰, 1888~1943)가 집필한 「한글공부」는 동아일보의 학생계몽대가 한글 강습 교재로 사용하였다. 한글 강습회가 성황을 이루자 1933년 조선총독부는 한글 강습회를 중단시켰으며 1935년부터는 전면 금지시켰다.
한글, 독립운동의 힘이 되다
일제강점기 우리말글의 규범 제정은 한글을 보존·확산시켜 나라를 찾으려는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여기에 자극받은 일제는 1938년부터 우리말 교육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1942년에는 치안유지의 명목으로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키기까지 했다. 온갖 고초와 수난 속에서 한글을 지키려는 노력은 나라를 찾으려는 원동력이자 구심점이었다.
<독립운동의 힘, 한글>전에서 꼭 살펴봐야할 점!
◆ “한글이 목숨”
대표적인 국어학자 최현배(崔賢培, 1894~1970)는 1930년대 한 음식점 방명록인 금서집(錦書集, 외솔기념관 소장)에 “한글이 목숨”이라는 친필을 남겼다. 어떤 상황에서 이 글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방명록의 문구는 일제 강점기에 한글을 지키려 했던 그의 간절한 마음을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다.
◆ ‘한글’ 명칭의 최초 기록, 「한글모죽보기」
‘한글’이라는 명칭은 「한글모죽보기」에 기록된 ‘배달말글몯음’을 ‘한글모’로 바꿨다는 설명에 처음 등장한다. 「한글모죽보기」는 국어학자 이규영(李圭榮, 1890~1920)이 1907년에 결성된 조선언문회(朝鮮言文會) 활동을 기록한 것이다.
◆ “글장님”을 없애자
1930년대 당시에 문맹을 “글장님”으로 지칭하였으며, 글장님을 없애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던 사실을 「동아일보」 등에 실린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한글 강습회가 성황을 이루자 1933년 조선총독부는 한글 강습회를 중단시켰으며 1935년부터는 전면 금지시켰다.
◆ 맞춤법 통일, 민족의식의 통일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우리 손으로 맞춤법을 통일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3년여에 걸친 노력 끝에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완성되었다. 맞춤법의 통일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향한 민족의 단결을 이루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독립운동의 힘, 한글> 주요 전시 자료!
원고감수: 전시운영과 신하영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