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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박웃음 2019. 11. 제 76호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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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부 박씨의 한글 소지

    명칭: 서강 내일 과부 박씨 언단
    만든이: 과부 박씨 / 서강 내일면 면장 및 고을 사또
    시대: 1817년(정축년) 혹은 1877년

    ‘답답한 놈이 소지(所志) 쓴다.’는 속담이 있다. 소지는 조선시대 소송문서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은 이를 관아에 제출해서 처결을 요청할 수 있었다. 소지는 소송을 제기한 사람이 직접 써야 했고, 그 내용은 법리에 맞게 논리적이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관아는 접수를 받아주지 않거나, 접수를 받았더라도 판결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송사는 곧 패가망신이라고 했다. 고단한 송사 과정을 빗대는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려한다면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일자무식한 사람이더라도 소지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충청도에 사는 과부 박씨는 친척조차 없이 홀몸으로 온갖 집안일을 돌봐야하는 딱한 처지였다. 박씨의 이러한 형편을 엿보면서 시댁의 선산(先山)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선산을 잃을 판국이었기 때문에 박씨는 소지를 써야했다. 하지만 그녀는 글을 몰랐다. 어렵게 고을 면장에게 부탁을 했다. 그녀는 저간의 사정을 불러주었고, 면장은 이를 한글로 받아썼다.

    과부 박씨의 한글 소지 내지. 한글로 그녀의 억울한 사연이 적혀있다.

    과부 박씨의 한글 소지 표지. 좌하단에 한문으로 소송문서의 성격이 적혀있다.

    삼가 살펴주십시오. 과부인 저의 팔자 괴팍하여 일찍 지아비를 여의옵고 일가친척도 없사옵고 죽지 못한 목숨이 몰골 말이 아니게 있사오니, 선조의 산소를 지키는 것은 오죽하겠습니까. 이희두라는 백성이 저 과부의 고단한 신세를 없이 여기고 자기의 부모 산소를 과부 시할아버지 산소 가까이에 투장(偸葬; 몰래 남의 산소 부근에 묘소를 씀)하니, 무덤의 주인을 몰랐다가 해포 만에 찾아 이장하라고 재촉하온즉, 작년 시월 안에 이장할 뜻으로 수기(手記; 다짐서)하여 주고 지금까지 이장을 아니 하오니 인심이 이러 하오면 과부가 엇지 시가의 선산을 보존하겠습니까. 이희두의 수기를 첨부하여 호소하오니, 잘 살펴주신 후 이희두를 잡아와서 각별히 다스려 주시옵고, 며칠 안에 무덤을 이장하도록 하여 과부와 같은 사람의 선영을 보존하옵기를 천만 바라옵고, 삼가 소지를 올리옵니다. 성주께서는 살펴주십시오.

    소지가 관아에 접수되면 원님은 즉시 판결을 내렸다. 그 판결문은 소지 아래 여백에 썼는데, 이를 뎨김(題音)이라고 한다. 원님은 뎨김에 관인을 찍고 소지를 올린 사람에게 되돌려주었다. 박씨가 올린 소지 끝에도 뎨김이 있다. 원님이 박씨에게 내린 뎨김은 이렇다.

    무덤 이장 문제를 조사할 것이니 이희두를 데려오라. 30일에 판결함.
    督掘次 李民喜斗持待向事 主人 卅日

    원님의 입장에서는 박씨의 주장만 들을 수 없었다. 이희두도 관청에 나오게 하여 대질 심문을 할 요량이었다. 이희두와 박씨를 대질 심문한 후 원님은 추가 판결을 내렸다. 그 뎨김은 박씨가 올린 소지 뒷장에 적혀 있다.

    비록 이장할 날짜를 정한 수기를 받았다고 하나, 이희두가 당초에 땅을 구입한 문서가 명백히 남아 있으니 그 땅을 직접 측량한 후에 처결할 수 있겠다. 장교(將校)는 직접 현장에 가서 조사해 오라. 3월 초5일에 추가로 판결함.
    雖捧定限手標 李民之當初買得文券昭然 則不可不圖尺後決處 故方送將校摘奸向事 將校 追題三月初五日

    추가 뎨김을 보았을 때, 이희두는 토지 매매 문서를 증거로 제출하여 본래 본인 소유의 땅임을 주장한 것 같다. 원님은 관원인 장교에게 현장 조사를 지시하였다. 그 이후의 소송 과정은 문서가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아마도 소송은 길어졌을 것이고, 과부 박씨는 패소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 박씨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억울함을 한글 소지에 담아 제출하는 것이었다. 비록 당시에 한글로 작성된 고아한 철학서까지는 없었더라도, 한글은 늘 힘없는 사람들 편에서 그렇게 함께하였다.

    만약에 사형을 내리는 사건의 진술서와 같은 것이 이두로 쓰였다면 글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은 한 글자의 차이로 누명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언문으로 그 말을 바로 쓰고 읽어서 심리하게 한다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모든 내용을 쉽게 이해시켜서 누명을 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26년(1444) 2월 20일 기사 중에서.

    원고 : 자료관리팀 박준호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