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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박웃음 2019. 11. 제 76호 국립한글박물관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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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국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푸른 눈의 조선인
    헐버트의 발자취를 따라 걸은 서울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역사상 가장 짧게 건국되었다 사라진 제국이 한반도에 존재했으니,
    바로 대한제국(1897~1910)이다. 대한제국은 일본과 중국, 러시아라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조선의 임금 고종이 탄생시켰으나 결국 15년을 버티지 못하고 그 수명을 다했다.
    이 땅이 혼란의 시기일 때 ‘호머 헐버트’가 대한제국을 찾는다. 그는 구한말에 한국 독립을 위해 힘쓴
    미국 감리교 선교사이며 언론인으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들의 가슴 속에 애국이라는 글자가 희미해진 오늘날, 서울 한복판에 남겨진
    헐버트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나라와 한글에 대한 사랑을 되새겨 보자.

    헐버트, 그는 누구인가

    호머 헐버트의 흑백 증명 사진▲ 호머 헐버트(1863~1949) 미국 출생인 헐버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조선으로 와 근대식 국립 교육기관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약 5년 후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한국을 찾게 된다. 돌아온 후 주시경, 김소월 등을 배출한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고종에게 정치적, 외교적, 문화적 자문을 하는 자격을 얻기도 했다. 특히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으로 고종황제의 특사를 세 번이나 받았다. 그는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영국인 어니스트 배델과 함께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일본의 압력으로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도 우리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86세에 공식초청을 받아 한국 땅을 밟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일주일 뒤 생을 마감한다. 이렇듯 평생을 한국의 독립에 바친 그의 활동 지역을 따라 육영공원터-배재학당역사박물관-중명전-러시아공사관-고종의 길-헐버트가 묻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돌아보았다.

    1886년에 나라에서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 육영공원

    육영공원은 1886년 9월에 조선정부에서 직접 주관하여 설립한 신식교육기관으로 초기의 서양식 교육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때 헐버트가 길모어, 벙커 등과 함께 조선에서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와 교사직으로 영어를 가르치며 우리나라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 당시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 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배워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891년 최초의 순 한글 세계 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육영공원 교재로 사용하였다. 그는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라면서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장했으며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및 저술했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 되자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육영공원터인 서소문동 38번지 일대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2호선 시청 역에서 내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조금만 걷다 보면 나타난다. 특히 이맘때면 길가에 떨어진 알록달록한 단풍잎을 소복소복 밟는 재미도 더해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육영공원은 사라졌지만 그 터를 표시하는 표지판만은 남아 그 시절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빽빽한 고층 빌딩 숲이 아닌 건물들 사이에 자리한, 작지만 푸른 산책길도 나 있어 쉬엄쉬엄 살펴보기 안성맞춤이다.

    붉은 장미가 원형으로 구현된 전시물 뒤로 녹음이 펼쳐져 있고 끝에는 갈색 건물이 들어서 있다.

    육영공원 터를 알리는 비

    서울시립미술관의 한국적인 기와 벽이 늘어서 있다.

    ▲ 서울시립미술관이 들어선 육영공원터

    헐버트의 두 번째 한국 방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이다. 지금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우리 곁에 남은 이곳은 초기부터 영어 수업을 비롯한 전인교육을 실천하였고,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한 신교육의 발상지이자 신문화의 요람이다. 한국 근대 교육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의 한 페이지이자, 한국 근대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정동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으며 서울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1916년 설립 당시 원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정동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아울러 김소월이 공부했던 체험 교실과, 서양문화와 연결고리가 되어 주었던 기독교 관련 유물, 한국 근대사에서 큰 역할을 했던 주시경, 나도향 등의 관련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근대풍의 4층 벽돌 건물이 멋들어지게 자리하고 있다.

    나무 책상과 나무 걸상이 놓인 옛 교실의 모습.

    배재학당이 지어진 뒤, 헐버트는 1893년에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파송 준비 과정을 마치고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는 한국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1908년에는 관립중학교의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이 책은 상·하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하권은 출간하지 못하고 상권만을 발행하였다. 이마저도 1909년 일제의 검열에 의해 금서 조치되어 출판사에 있던 책이 모두 몰수된 뒤 불태워졌다고 전해진다.

    1930년대 배재학당의 수업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 까까머리를 하고 흑색 교복을 입은 10여 명의 학생들이 칠판에 적힌 영어 문구를 바라보고 있다.▲ 1930년대 당시 배재학당 수업 모습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전시실 내부로 배재학당 출신 인물들의 사진과 업적을 소개한 전시물이 걸려있다.

    역사의 아픈 순간을 함께한 친우, 구러시아 공사관과 고종의길-중명전

    1890년대 중반부터 일본은 조선을 더욱 심하게 압박해왔다. 헐버트는 일제의 침탈 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 외교 문제에 대해 관심을 쏟았고 자주권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을미사변(1895) 이후에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을 정도로 고종의 신뢰를 받는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1905)이 자행되자,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고종 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안타깝게 실현되지 못했다.

    근대풍의 2층 건물이 멋들어지게 자리하고 있다.▲ 전시실 전경

    을사늑약 현장을 재현한 모습. 네모난 테이블에 9명의 인물이 둘러앉아 회의 하는 모습을 재현했다.▲ 을사늑약 현장 재현 모습

    중명전 내 마련된 헤이그특사 사건을 다루는 전시 공간. 근대풍의 벽, 창문 등이 재현돼 있다.▲ 헤이그 특사를 설명해놓은 전시실

    또한 헐버트는 1907년 고종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 데 크게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다. 지금 소개하는 중명전은 근대 건축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아픔이 서린 곳이자 고종이 이준과 헐버트를 비밀리에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 장소이기도 해 역사적 의미가 크다. 중명전은 원래 덕수궁 별채로 1901년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지만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현재는 일반에 개방돼 박물관처럼 활용되고 있다.

    흰색 정자 뒤로 구 러시아공사관이 탑처럼 솟아 있다.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구 러시아공사관의 탑 형식의 하얀 건축물

    구 러시아공사관 맞은편에서는 ‘대한제국’의 역사를 볼 수 있는 판넬이 조성돼있다. 고종의 길로 들어서는 문에 ‘오얏꽃 핀 날들을 아시나요’라고 적힌 현판이 놓여있다. 현판에서 아관을 떠나던 고종의 모습을 묘사한 글과 사진을 볼 수 있다. ▲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대한제국’의 역사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중명전과 함께 살펴보면 좋을 곳이 더 있다. 바로 근처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한 구 러시아공사관과 고종의 길이다. 정동공원 한가운데 놓은 흰 정자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구 러시아공관의 흔적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아관파천’의 살아있는 현장으로 앞서 언급한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과 친일내각에 포위된 채 경복궁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고 결국 1896년 새벽, 고종과 태자(순종)은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당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 역사를 담고 있는 건물과 길이 우리의 일상에 숨 쉬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고종의 길 양쪽으로 돌로 만든 낮은 담벼락이 이어진다

    고층 빌딩 사이에 재현된 고종의 길 모습. 그리 높지 않은 옛 기와식 담벼락 사이로 나무문이 놓여 있다.

    평생 바라던 독립된 조선에서의 영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헤이그 특사 실패 이후, 이를 빌미로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미국에서도 미주 독립 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제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분리 독립을 호소하였다. 특히 1919년 3·1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정부의 초청으로 86세의 노구의 몸으로 내한했으나 여독을 이기지 못해 일주일 만에 병사했다. 이후 유언을 따라 합정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했다. 그의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이곳에 잠들다”고 기록되어 있다. ‘1950년,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에 이름을 올리고, 평생 그토록 사랑한 대한민국에서 안식을 취한다. 2014년에는 한글 보급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우리의 근대사와 궤를 같이한 호머 헐버트가 남기고 간 흔적을 살펴보는 여행은 이로써 끝이 났지만, 그의 정신만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 역시 지난날을 잊지 않는 자세로 다가올 미래를 맞이하길 바란다.

    호머 헐버트를 기리는 비석

    호머 헐버트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 등이 영면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전경. 가운데로 돌길이 나 있으며 우측 잔디밭에는 십여 개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다.

    여·행·가·이·드

    육영공원 터

    서울 중구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서울 중구 서소문로11길 19 배재정동빌딩

    • · 이용 시간 : 매일 10:00~17:00
    • · 문의 : 02-319-5578

    중명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1-11 덕수궁 중명전

    • · 이용 시간 : 매주 화요일~일요일 (매주 월요일, 설날, 추석 휴관, 10:00~17:00)
    • · 문의 : 02-771-9952

    구러시아공사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1-18

    • · 문의 : 02-3396-5882

    고종의 길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1-18

    • · 이용 시간 : 매주 화요일~일요일 (월요일 휴관, 09:00~18:00, 동절기 09:00~17:30)
    • · 문의 : 02-771-9951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14-3

    • · 이용 시간 : 월-토: 10:00~17:00
    • · 문의 : 02-332-9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