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창경궁에는 자경전慈慶殿이라는 전각이 있었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正祖(1752-1800)가 어머니 혜경궁惠慶宮(1735-1815)을 잘 섬기기 위해 1777년(정조 1)에 창경궁의 양화당養和堂 옆 작은 언덕에 지은 전각이다. ‘자경慈慶’은 자전慈殿(임금의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는 빈터이지만 정조의 아들 순조純祖(1790-1834)가 어머니 효의왕후孝懿王后(1753-1821)의 명으로 1808년(순조 8)에 지은 『자경전기慈慶殿記』가 남아 있어 자경전의 유래와 당시 모습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어떤 건물을 새로 지은 뒤 그것의 유래 등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오래전부터 행해져 왔던 관습이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절이나 탑 등을 세운 기록이 종이 문서나 명문銘文으로 전한다. 순조는 조선의 다른 어떤 왕들보다 궁궐의 전각과 정자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자경전기慈慶殿記』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부모를 잘 섬김으로써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했던 순조의 마음가짐이 잘 드러나는 글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德溫公主(1822-1844)가 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1789-1857)의 명으로 한글로 적은 『경뎐긔』가 발견되면서 이들 부녀의 『자경전기』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순조의 『자경전기』와 그것을 한글로 옮겨 쓴 덕온공주의 『경뎐긔』는 정조-순조-덕온공주로 이어지는 조선 왕실 3대의 효심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에 누구나 갖춰야 할 기본 덕목인 동시에 군왕에게는 나라의 안위를 지키고 태평성대를 불러오는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경뎐긔』는 어떤 내용일까?
『경뎐긔』는 덕온공주가 순조의 『자경전기』 원문의 한자음을 한글로 적고 토를 단 뒤 이어서 우리말 번역문을 적은 글이다. 책의 형식은 절첩식으로 되어 있으며, 접었을 때 크기는 32×11cm(세로×가로)이다. 총 48면으로, 전체를 다 펴면 길이가 무려 528cm에 이른다. 표지는 붉은 비단을 사용하였으며 표지 제목은 적지 않았다. 표지에 낡은 흔적이 전혀 없는 것을 볼 때 후대에 다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공주의 후손들은 『경뎐긔』를 별도의 포장지에 싸서 소중히 보관하였으며, 앞쪽에 ‘경뎐긔문’이라고 제목을 적어 놓았다.
본문 끝의 여백에는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尹伯榮(1891-1986)이 본문과 같은 색 종이를 붙여 놓았는데 ‘대한 이십이대 졍종대왕겨오샤 어마님 되시는 사도셰자 부인 혜경궁 마마를 대궐노 뫼셔 와 자경뎐을 짓고 효봉하셔나니 이 글이 자경뎐 쇠문의 대순조황뎨 졔삼녀 되시는 덕온공주겨셔 모명을 밧드러 쓰셔스니 이 글시가 덕온공주 친필이오’라고 적어 덕온공주의 친필임을 밝히고 있다.(도판 1)
덕온공주의 『경뎐긔』는 순조의 『자경전기』를 번역한 것이므로 구성 및 내용이 한문본과 동일하다. 정조가 자경전을 지은 목적과 ‘자경慈慶’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 효의왕후가 혜경궁 홍씨의 양보로 자경전에서 지내게 된 사실, 효의왕후의 명으로 순조가 자경전기를 짓게 된 점, 창경궁 내 자경전의 위치, 효의왕후의 아름다운 덕, 자경전에서 바라본 주변 환경, 자경전의 빼어난 경치와 사계절 등을 차례대로 수록하였다.
『자경전기』를 보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힘들었던 순조가, 혜경궁을 잘 섬겼던 아버지 정조와 어머니 효의왕후를 따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부모님이 혜경궁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도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함으로써 복을 받아 나라가 잘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정조 비 효의왕후는 아들 순조에게 아버지 정조를 본받게 하려고 『자경전기』를 짓게 하였고, 그 뜻을 이어 순조 비 순원왕후도 막내딸 덕온공주에게 순조의 『자경전기』를 한글로 필사하게 하였다.
『경뎐긔』의 내용 중에서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경뎐긔』는 누가 번역하고 언제 필사했을까?
『자경전기』를 지은 시기는 순조가 18세 때인 1808년(순조 8)임을 기문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지만 덕온공주의 『경뎐긔』는 누가 언제 번역했는지 알 수가 없다. 덕온공주가 직접 번역하여 한글로 옮겨 적었거나 아니면 다른 이가 번역한 것을 공주가 필사만 한 것일 텐데 현재로서는 두 번째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린다.
우선 덕온공주는 한문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덕온공주의 한문 실력을 가늠할 만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덕온공주의 두 언니인 명온공주와 복온공주 관련 자료가 남아 있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명온공주明溫公主(1810-1831)의 경우, 오빠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와 주고받은 한글 편지 안에 본인이 직접 지은 한시가 한글로 적혀져 있으며, (『익종간첩翼宗簡帖(건乾)』(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참조). 복온공주福溫公主(1818-1832)의 경우, 12살 때 창덕궁의 옥화당玉華堂에서 지내면서 지은 한시 모음이 남아 있다.(『복온공주글씨첩』(개인 소장) 참조).
그런데 덕온공주가 『자경전기』를 번역할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공주가 『자경전기』를 직접 번역했을 거라고 보기는 힘들 듯하다. 순조가 효의왕후의 명으로 『자경전기』를 지은 것이므로, 효의왕후를 위해 한글 번역본을 따로 마련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시 남성들이 여성들과 글로써 소통할 때 사용된 문자는 한글이었다. 편지의 경우만 보더라도 발신자와 수신자 중 한 명이 여성인 경우 한글로 작성되었다. 효명세자 또한 누이들이 기본적인 한문 소양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지은 한시를 누이들에게 한글로 번역해 보여주며 누이들과 한글로 소통하였다. 그러한 점들을 볼 때 순조가 효의왕후를 위해 『자경전기』를 한글로 번역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덕온공주는 그 번역본을 보고 베꼈을 가능성이 있다.
덕온공주가 『경뎐긔』를 필사한 것은 언제쯤일까? 필체의 성숙함 정도로 봤을 때 10대 초반은 아닌 듯하며 최소한 10대 중반 이후일 텐데, 그렇다면 아버지 순조가 돌아가신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순원왕후가 덕온공주에게 아버지의 『자경전기』를 한글로 필사하도록 한 이유는 글씨 잘 쓰는 막내딸이 특별히 이 일을 해주기 바라서였겠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자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여서 덕온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덕온공주가 9세 때인 1830년(순조 30)에 효명세자가, 11세 때인 1832년(순조 32)에 언니 명온공주와 복온공주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고, 13세 때인 1834년(순조 34)에 아버지 순조도 돌아가셨다. 덕온공주가 아버지 삼년상 이후 16세 때 윤의선尹宜宣(1823-1887)과 혼인하였다. 그러한 흐름상 덕온공주가 시집가기 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를 때 어머니 순원왕후의 명으로 『경뎐긔』를 필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후기 여성들의 한글 사용 특징을 보여주는 『경뎐긔』
덕온공주의 『경뎐긔』는 순조의 『자경전기』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한자 없이 원문의 한자음을 한글로 적은 뒤 토를 달고 이어서 번역문을 적었다. 조선 시대에 중앙에서 간행한 언해서들은 대개 한문을 먼저 적고, 한자어 뒤에 토가 달린 문장을 제시한 뒤(한자 아래 해당 음을 한글로 적음), 우리말 번역문을 싣는 3단계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덕온공주의 『경뎐긔』에 보이는 방식은 이전의 일반적인 언해 방식에서 첫 번째 단계가 생략되고, 두 번째 단계에 있던 한자가 빠진 것이다. ‘양양가襄陽歌’, ‘출사표出師表’ 등 『고문진보언해古文眞寶諺解』를 베껴 쓴 덕온공주의 다른 한글 자료들도 대부분 같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 후기 여성들이 쓴 문집에서도 보이는 특성이다.(김호연재金浩然齋(1681-1722)의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 등).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간혹 오류가 생기기도 한다. 덕온공주의 『경뎐긔』에는 한글로 한자음을 적고 토를 단 부분에서 순조의 『자경전기』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발견된다. 원문의 ‘남南’을 중복하여 쓰거나 ‘야也’, ‘기氣’와 같은 글자를 빠뜨리기도 하였다. 그러한 오류는 한문 자료를 한글로만 적어 읽었던 조선 시대 여성들의 필사 자료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공주가 쓴 한글 자료에서는 한문 문장을 한글로만 적어 읽고 우리말로 번역하여 즐겼던 당시 여성들의 한글 사용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표 1> 덕온공주의 『경뎐긔』와 순조의 『자경전기慈慶殿記』 비교
『경뎐긔』는 3대에 걸쳐 이어진 조선 왕실의 효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조선 시대에 부왕이 한문으로 쓴 글에 담긴 뜻을 딸인 공주가 이어받아 한글로 직접 베껴 쓴 사례는 극히 드물다. 『경뎐긔』는 조선의 공주가 궁체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쓴 한글 자료로서 조형미와 개성이 뛰어나며, 19세기 국어의 특성을 보여주는 자료로서도 연구할 만한 가치가 높다. 앞으로 관련된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가 이어져 이 자료의 다양한 가치가 밝혀지길 기대한다.
연도 | 자경전 관련 주요 사건 및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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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7년(정조 1) | 정조正祖(1752-1800)가 어머니 혜경궁惠慶宮(1735-1815)을 위해 자경전慈慶殿 건립. |
1802년(순조 2) | 정조 승하 후 혜경궁은 며느리 효의왕후孝懿王后(1753-1821)에게 자경전을 양보하고 경춘전景春殿으로 거처를 옮김. |
1808년(순조 8) | 순조純祖(1790-1834)가 어머니 효의왕후의 명으로 『자경전기慈慶殿記』를 지음. |
1827년(순조 27) |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가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1789-1857)에게 존호를 올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자경전에서 진찬進饌 거행함. |
1828년(순조 28) | 효명세자가 순원왕후의 40세 생신을 경축하기 위한 진찬을 자경전에서 거행함. |
1829년(순조 29) | 효명세자가 순조의 40세 생신과 즉위 30년을 기념하기 위한 내진찬을 자경전에서 거행함. |
1822년(순조 22)-1844년(헌종 10) 사이 | 덕온공주가 순원왕후의 명으로 순조의 한문본 『자경전기』를 한글로 필사함 |
1865년(고종 2) | 1865년 10월 자경전 철거 |
1911년 | 일제가 자경전 터 동편에 이왕가박물관을 새로 지음 |
1865년(고종 2) | 1865년 10월 자경전 철거 |
1945년 이후 | 이왕가박물관 건물을 왕실도서관 장서각으로 용도를 바꾸어 사용함. |
1964년 | 덕온공주의 손녀 윤백영尹伯榮(1891-1986)이 장서각을 드나들며 그곳에 소장된 아버지 윤용구尹用求(1853-1939)의 『정사기람正史紀覽』 중 없어진 권19를 새로 번역하여 씀. |
1992년 | 역사 복원의 일환으로 옛 장서각 건물을 철거함. |
2019년 | 현재 빈터만 남아 있음 |
원고 : 전시운영과 고은숙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