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를 편하게 쓰고 지울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으로부터 김상언 대표는
점자를 쓰고 지울 수 있는 휴대용 점자 입력기 ‘버사 슬레이트’를 개발했다.
한글 점자를 통해 시각 장애인들과 더욱 긴밀히 연결된 것 같다는 김상언 대표.
오랫동안 한글 점자를 지켜보며 시각 장애인들의 편리함을 위해 노력해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한박웃음> 독자들에게 인사와 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한박웃음 독자 여러분. 저는 ㈜오버플로우 대표 김상언입니다. ㈜오버플로우는 2017년 1월에 설립된 시각 장애인 보조공학 기업이고요. 시각 장애인이 일상의 다양한 상황에서 겪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하나씩 해결할 수 있도록 해법을 제공합니다.
저는 시각장애 보조공학 분야에서 약 16년째 종사해 오고 있는데요. ㈜오버플로우 이전에는 시각 장애인 보조공학 기기 회사 영업팀에 있었어요. 특히 해외 쪽을 맡으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는 어떤 해법으로 시각 장애인들의 문제들을 풀고 있는지 10년 넘게 봐왔죠. 이 경력이 국내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훌륭한 해법들을 발굴하는 바탕이 됐어요.
더불어 국내에 있는 괜찮은 제품 및 서비스를 해외에 소개하는 역할도 하다 보니 시각 장애인에게 필요한 부분들을 해결하려는 세계 시장의 노력을 전체적으로 보게 됐죠. 이 모든 것들이 ㈜오버플로우의 발전 방향과 계획을 세우는 부분에서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회사를 운영하며 시각 장애인들이 점자를 쓰고 지울 수 있는 ‘버사 슬레이트’를 개발하셨습니다. ‘버사 슬레이트’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버사 슬레이트는 점자 필기도구입니다. 기존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점자 필기도구로는 점자판이 있는데요. 비장애인들은 종이나 스마트폰에 그냥 기록하면 되지만 시각 장애인은 촉각으로 정보를 얻는 점자를 사용하다 보니 점자판으로 양각을 만들어서 이를 손끝으로 읽어야 하죠.
▲ 버사 슬레이트
하지만 점자판에 종이를 끼워 넣고 점관에 맞춰 점필로 점자를 새겨넣은 뒤, 다시 종이를 빼서 뒤집어야 하는 과정이 좀 불편해요. 그래서 종이 없이 간편하게 쓸 수 있도록 만든 점자 필기도구가 바로 버사 슬레이트예요. 게다가 버사 슬레이트의 핀은 플라스틱이거든요. 이 때문에 종이보다 촉감이 또렷해요. 그래서 손가락 감각이 아직 예민하지 못한 분, 특히 중도 실명하신 분들이 점자를 배우기에도 좋아요.
▲점자판으로 점자를 기록하고 있는 모습
▲버사 슬레이트를 이용해 점자를 기록하고 있는 모습
‘버사 슬레이트’를 개발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4년 전에 맹학교 수학 선생님께서 문제를 제기해 주셨어요. 수학 문제를 풀 때 계산한 값을 적어놓고 이어서 풀려고 하면 종이를 뒤집어서 그 값을 확인한 다음 다시 뒤집어서 풀고 하는 과정이 너무 번거롭다고요. 그래서 종이 없이도 바로 쓸 수 있는 그런 점자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이건 국내만의 문제는 아니었죠.
또 점자판으로 점자 연습할 때 사용되는 종이가 일반 용지가 아니에요. 두꺼운 종이라서 가격이 좀 더 비싸죠. 이런 용지들이 연습용으로 한번 사용하고 나면 그냥 버려지는 거예요. 이 두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버사 슬레이트를 만들게 됐어요.
시각 장애인분들은 처음 이 제품을 사용하실 때, 기존에 없던 제품이기도 하고 종이에 쓸 때랑 좀 느낌이 다르다 보니 이질감을 느껴서 빨리 쓰지를 못하시더라고요. 하지만 몇 번 사용해보시더니 바로 적응하셨어요. ‘점자가 또렷해 종이 점자보다 인지하기가 쉽다’고 하시더라고요.
▲ 버사 슬레이트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김상언 씨
개발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처음 생각했던 방식으로는 버사 슬레이트가 잘 구현되지 않았어요. 버사 슬레이트 속 촘촘히 박힌 작은 핀들을 고정하고 해제하는 구조를 설계하는데, 아무리 수정해도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때부터 이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다양한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됐어요. 기술 공학 대학교수님들께 조언도 구해봤고 대기업에서 은퇴한 엔지니어들과 연결되기도 했죠. 개선된 아이디어가 계속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실물로 구현은 안 되더라고요.
계속 실패하니 ‘실현이 안 되는 아이디어였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포기 직전까지 갔거든요. 그때 청년벤처 포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멘토 한 분이 본인이 잘 아는 하드웨어 설계 엔지니어를 소개해주셨어요. 그 엔지니어분께 지금까지 해왔던 과정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죠. 그런데 그분이 ‘굉장히 재밌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걸 어려운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거죠. 그 반응을 보고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즐기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그분과 회의하면서 개선된 아이디어가 나왔고 실제 제작해보니 구현이 되는 거예요. 너무 감사했죠. 그래서 제가 그분께 우리 회사에 합류해달라 입사를 제의했고 현재 같이 일하고 계십니다.
한글 문장을 한글 점자로 점역해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이트를 운영 중이십니다. 한글 점자 1종과 2종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1종은 정자, 2종은 약자입니다. 1종은 한글 초성·중성·종성에 각각 1대 1로 점자가 대비되는 거죠. 그러면 한 글자가 최대 세 칸을 차지하거든요. 예를 들어 ‘신’이면 초성 시옷, 중성 이, 종성 니은 이렇게 세 칸이 사용되기 때문에 부피를 많이 차지하게 되죠. 그런 것 때문에 약자를 만들었어요. 그게 2종이에요. 글자 ‘가’로 따지면 1종에선 두 칸이 사용되는데 ‘가’ 하나를 한 칸에 표현할 수 있게 만든 거죠. 같은 문장이라도 종에 따라 점자 모양이 다를 수 있어요. 보통 점자를 배우면 1종부터 배우세요.
▲ 한글 점자 1종으로 기록한 ‘국립한글박물관’
점자를 설명 중인 김상언 씨
그동안 한글 점자에 대해 오랫동안 지켜봐 오셨을 텐데요. 점자 시장의 현황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점점 점자 사용 인구가 줄고 있어요. 시각 장애인분들은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요. 중도에 실명하신 분들은 손가락 끝이 예민하지 못하니까 점자 배우기를 어렵게 느끼고 포기하세요. 대신 음성에 많이 의존하시죠.
하지만 음성만으로는 정보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예를 들어 ‘빛’을 발음할 때, 빗과 빚의 발음과 비슷하죠. 철자를 확인하지 못하면 정확한 정보 전달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시각 장애인분들이 정보를 습득하거나 의사소통할 때 점자가 필수예요.
점자의 필요성은 크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요. 점자가 잘 보급되지 않는 것은 물론 점자를 음성으로 대체해버리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점자 시장은 계속 커지는 시장은 아니에요. 다만 중요성으로 따지면 커져야 하는 시장이에요.
점자에 대해 대중들이 관심을 두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강의실 명패에 이름을 점자로 함께 표시한다든지, 명함을 만들 때 점자를 함께 넣어 만든다든지 이렇게 하나씩 해나가야 할 것 같아요. 그게 조금씩 늘어나게 된다면 우리 사회 주변에서 점점 흔하게 점자를 접할 수 있게 되잖아요. 점자 환경에 많이 노출되면 점자에 관한 대중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확산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실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부터 스스로 실천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김상언 대표에게 ‘한글 점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에게 한글 점자는 시각 장애인 사회와 저를 이어주는 ‘다리’예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제가 한글 점자를 배우고 익히게 된 게 불과 한 3, 4년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사업 활동을 하거나 시각 장애인분들을 만날 때, 점자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제가 제품을 설명할 때 점자를 그 자리에서 읽고 얘기를 하니까 아주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시각 장애인분들이 저를 대하시는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 자신에 속해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대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저도 그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생각하고 같은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글 점자를 익히고 알게 되면서 좀 더 깊이 있게 시각 장애인 사회에 다가갔다고 생각해요.
* 본 기사는 취재하여 작성된 내용으로,
국립한글박물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