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 연계 교육 프로그램에 가장 어울리는 문장이 아닐까.
현시대를 살아가는 예술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은 그냥 보아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관객들이 작가의 의도와 작품의 내용을 깊이 알게 될수록, 작품에서 느끼는 신선한 즐거움은 배가 된다.
남녀노소 모두가 관심을 가진 <근대 한글 연구소> 연계 교육 현장
올해로 4회를 맞이하는 ‘한글 실험 프로젝트’는 19명 4팀의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근대 시기 한글의 변화상을 주제로 진행한 프로젝트로, 그들의 연구 결과를 10월 7일에 공개하였다. 프로젝트의 결과로 마련된 <근대 한글 연구소> 전시는 ‘영상, 공예, 패션’ 분야의 협업 큐레이터 3명이 함께 기획하였다. 전시 연계 교육에서는 3명의 협업 큐레이터를 만나 분야별로 한글 유물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과정에 대해 듣는 시간을 가졌다. <근대 한글 연구소> 전시 연계 교육은 11월 11일부터 11월 25일까지 매주 금요일 총 3회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이번에 찾아간 교육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공예’ 분야 하지훈 협업 큐레이터에게 7점 공예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이날 교육 현장에 참석한 이들은 사전 참가 신청자들로, 교육 시작 전부터 전시 리플릿을 꼼꼼히 살펴보는 등 수업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2회차 수업을 담당한 하지훈 교수가 “이렇게 좋은 날씨에는 바깥에서 자연을 느껴야 하는데 강의실에 들어와 계시게 해서 죄송하다” 라며 농담을 던지자 편안한 분위기에서 수업이 시작되었다.
▲강의를 진행한 하지훈 교수
하 교수는 작가들에게 전통을 바꿔 나간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행위이고 많은 책임감을 요구한다고 하면서도, “한글이 주는 무게감에 너무 눌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창조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참여 작가들에게 조언을 했다고 한다. 또한 “한글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보니 오히려 한글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며 이번 전시는 ‘잊고 있던 한글의 가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전시’라고 설명하였다.
특히 하지훈 교수는 한글을 ‘위대한 유산’이라고 강조하였다. 세계 대부분의 글자가 그림에서부터 시작됐지만, 한글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과학적인 문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글 창제를 하던 시기에 문자는 지식인들만의 전유물이었고 지식이 곧 권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력을 지키려고 애쓰기보다는 모든 사람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세종대왕의 인품을 극찬하였다. 이번 기획전시를 통해 일반 관람객들이 한글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하 교수는 수강생들과 3층에 있는 기획전시장으로 향했다.
▲ 수업에 집중하는 수강생들
근대 한글, 현대 공예를 만나다
수강생들은 기획특별전 전시장에서 한글을 공예 분야로 재해석한 작품들을 만났다. 이곳에는 △이슬기 △유정민 △김무열 △권중모 △윤새롬 △유남권 △스튜디오 페시 등 총 일곱 작가의 공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슬기 작가의 <됴찬쇼>
▲유정민 작가의 <다섯 개의 기역>(왼쪽)과 <아야어여오>(오른쪽)
첫 번째 공간인 ‘동서말글연구실’에서 만난 이슬기 작가의 <됴찬쇼>는 프랑스 선교사가 서구적 문법 체계에 맞춰 한국어를 분석한 책인 『한어문전』 속 ‘됴타(좋다)’의 여러 활용 예시를 발췌해 장신구로 재해석하였다. 다음으로 만난 작품은 유정민 작가의 의자 <다섯 개의 기역>과 책장 <아야어여오> 였다. 근대 시기 낯선 문자인 한글을 바라보는 서양인의 시선이 담긴 『금단의 나라 조선』의 한글 반절표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이루어졌는데,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곡선으로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한글을 표현하였다.
▲김무열 작가의 <권점: 띄어서 쓰기>
▲권중모 작가의 <획을 주름 접다 시리즈>
▲윤새롬 작가의 <어느 날의 조각_선반 02>
두 번째 공간인 ‘한글맵시연구실’ 속 김무열 작가의 작품 <권점: 띄어서 쓰기>는 근대 국어 교과서 『신정심상소학』에 사용됐던 권점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커다란 두 조형물은 한글의 모음과 자음의 형태를 변형한 것이며, 중간의 연결체는 권점을 은유한다. 그 옆에 자리한 <획을 주름 접다 시리즈>는 권중모 작가의 작품으로 『한불자전』, 『성경직해』 등에 사용된 붓글씨를 닮은 근대 연활자 서체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한지 조명이다. 한지에 빛을 더했을 때 한글의 조형미가 잘 표현되도록 자음자와 모음자의 형태를 여러 부분으로 분할하고, 분할한 글자의 형태대로 한지에 주름을 만들었다. 한글 서체의 매력을 담은 일상생활 용품이자 시각적 설치 작품이기도 하다. 하 교수는 “붓글씨의 획이 휘어지는 모습을 최대한 담기 위해 접혀지는 종이 각도를 매우 섬세하게 처리하였다.”고 설명하며 수강생들이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부분까지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다음으로 만난 윤새롬 작가의 <어느 날의 조각_선반 01, 02> 작품은 주시경의 저서 『말의 소리』 중 한글 가로풀어쓰기 예시를 재해석하여 작업하였다. 색상은 저녁 하늘, 햇빛, 나뭇잎 등 자연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항상 우리를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처럼 한글 또한 우리 주변에서 계속해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남권 작가의 <지태칠기(한글 시리즈)>
▲스튜디오 페시의 <자모타일>
세 번째 공간 ‘한글출판연구실’에서는 유남권 작가의 <지태칠기(한글 시리즈)>를 만났다. 붉은색 주칠 작품은 『해파리의 노래』, 『사랑의 무덤』 등 근대 출판물의 한글 제목 서체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검은색 흑칠 작품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 기본 형태를 본떠서 만들었다. 작가는 관람객이 주칠과 흑칠을 비교하며 한글 서체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스튜디오 페시의 <자모타일>은 「독립신문」 창간호 논설의 일부를 발췌해 탄생한 작품이다. 타일을 재료로 활용했는데, 이는 타일의 건축적 성격이 일정한 규칙으로 자모를 조합하는 한글과 비슷하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하 교수는 “얼마든지 변형 가능한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설명하였다.
작품을 모두 둘러본 뒤에는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 후 수업을 마쳤다. 이날 수강생들은 단순히 작품의 외형만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소장 자료를 재해석한 예술의 다양한 시선과 한글의 무한한 확장성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글실험프로젝트가 4회째 열리고 있는데, 1회와 2회 때는 작가로서 참여했어요. 3회와 4회는 큐레이터 역할을 했습니다. 한글을 작품에 잘 녹여낼 수 있는 작가인지를 고려해 섭외를 하였고, 저는 작가가 작품을 만들 때 중간에서 조언을 해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이번 <근대 한글 연구소> 기획전시 연계 수업에서는 작가들의 의도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는 도슨트 역할을 했어요. 설명을 듣지 않고 작품만 봤을 때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거든요. 특히 공예 작품들은 사용자와 관람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해서, 이해를 돕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강연을 하면 전문가분들이나 전공을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오늘은 수강 목적도, 연령대도 다 다른 분들이 오셔서 강연을 들으셨던 게 기억에 남아요.
또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한글과 같은 전통 유산을 꼭 엄격하게 다루고, 있는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변형이 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표준이 되니까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연해질 필요가 있는 거죠. 그래서 지금 한글을 아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마 100년, 200년 후에는 우리가 지금 만들어놓은 결과물들이 전통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가치를 부여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지훈 교수(계원예술대학교 리빙디자인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