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잡지 『어린이』 창간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어린이』는 짓눌리고 억압받던 어린이들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꿈꾸며 만든 한글 잡지로, 일제 강점기에 나온 아동, 학생 잡지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발간된
인기 잡지였습니다. 방정환 선생님 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잡지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는데요.
이번에는 잡지 『어린이』를 만드는 데 노력하셨던 개벽사 편집실 사람들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잡지 『어린이』에 실린 원문을 토대로 재미있는 내용만 뽑아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어린이』 제12권 제1호(1934년), 「우리들의 선생님」
여름에 땀을 많이 흘리시는 방정환 선생님
방정환 선생님은 『어린이』 초대 편집장이시자 잡지 『어린이』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분입니다. 초기에는 잡지 원고를 쓸 사람이 부족해서 ‘소파(小波)’, ‘몽중인(夢中人)’, ‘ᄭᅡᆯᄭᅡᆯ박사’, ‘북극성’ 등 다양한 작가 이름을 쓰면서 여러 종류의 글들을 실으셨어요.
방 선생님은 만두와 식혜를 좋아하시고, 꽃은 히아신스와 복사꽃을 좋아하세요. 땀이 많아서 더운 여름을 싫어하시는데요, 여름 여행은 징역살이보다 더 괴롭다고 하세요. 최신 기기에도 관심이 많으신데요, 시골을 다니면서 독자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사진기계를 사서 배우셨다고 해요. 실제로 잡지에 직접 찍으신 사진을 싣기도 하셨어요. 개벽사 안에서는 ‘전차 광고를 꾸미랴, 원고 쓰랴, 전화 앞으로 2층 위로 왔다 갔다 바쁘시고, 머리를 짚고 엎드려서 무언가를 궁리하고 계시는’ 모습이에요. 원래는 손이 끊길 새 없이 담배를 피웠지만 어린이 독자들의 염려와 권유로 금연에 성공하셨어요.
“우리 방 선생님 담배를 잡숫지 말아 주십시오. 11월호 방 선생님 미행기에 보니 선생님 입에 담배가 떠날 사이가 없으시다 하오니 저희들 마음에 대단히 염려됩니다. (고흥 어린이수양단 신을식)
(답변) 감사한 말씀입니다. 나도 방 선생님께 말씀할 터입니다. (‘직이’)” 『어린이』 제4권 제1호, 「독자담화실」
“신년호 때 신을식 씨 말씀에 대답하기를 방 선생님께 담배를 끊으시라고 말씀드리겠다더니 그 후 어찌 되었습니까? 항복을 받았습니까? (진남포 윤성)
(답변) 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방 선생님은 …… 다만 손끝이 심심하고 원고 쓰실 때나 동화를 꾸미다가 생각이 안 날 때 심심풀이로 피우시는 것이니 그리 해독이 있지는 않을 것 같으나 그러나 여러분이 하도 염려를 하시니까 일절 피우지 않겠다 하십니다.” 『어린이』 제4권 제2호, 「독자담화실」
미소를 지으며 미담을 써 주시는 이정호 선생님
이정호 선생님은 영업국에서 일하다가 편집실로 옮겨 와서 『어린이』 잡지 편집을 도우시다가 편집장까지 맡으셨어요. 나이 어린 색시같이 몸이 가늘고 목소리까지 가냘프신데요, 아호(雅號)인 ‘미소(微笑)’와 같이 늘 웃고 계셨다고 해요. 글씨체는 가늘고 깨알 같아서 본인도 이다음에 늙으면 못 알아볼 정도라고 하네요. 잡지에는 미담을 전문으로 써주셨어요.
“이정호 씨, 호마다 미담을 쓰시는 정호 씨! 아직 장가도 안 가신 개벽사 안에서 제일 나이 어린 색시 같은 이십니다. 가느란 몸과 가늘게 쓰는 글씨는 아주 여학생 같지요.”
『어린이』 제4권 제1호, 「이 모양 저 모양」
“이정호 선생님 글씨는 깨알 같아서 이 선생님 자신도 이다음에 늙으셔서 못 알아보실 지경이지요.”
『어린이』 제12권 제2호, 「편집을 마치고」
야근하다 호떡 11개까지 드신, 호떡 귀신 신영철 선생님
신영철 선생님은 조선 명승 지리를 재미있게 써 주시는 분이에요. 충청남도 공주 영명(永明) 학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다가 개벽사에 편집자로 오셨어요. 중간에 건강 문제 등으로 퇴사하였으나 방정환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재입사하여 제3대 편집장을 맡아 주셨어요. 몸이 굉장히 마르셨고요, 웃을 때 잇몸이 시뻘겋게 드러나고 찡그리는 얼굴은 애달픈 나그네와 같다고 해요. 신 선생님은 호떡을 좋아하셔서 보통 4~5개를 먹으시고, 야근하다 배고플 때는 11개까지 먹어보셨다고 해요.
▲ 『어린이』 제4권 제1호(1926년, 영인본)
*신영철 선생님 사진(왼쪽 하단 첫 번째)
어린 애독자에서 잡지 편집장이 된, 젊은 피 윤석중 선생님
윤석중 선생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요 「짝짜꿍」, 「집 보는 아기」 등 수많은 동요를 지으신 분이세요. 윤 선생님은 『어린이』 창간호부터 애독자였는데요, 어른이 되어 『어린이』 잡지 편집장까지 맡으셨어요. “남들이 돈으로 할 때에 나는 정성으로 하렵니다. 남들이 재주로 할 때에 나는 노력으로 하렵니다.”라는 입사 포부를 품고 개벽사에 들어오셨어요. 윤 선생님이 독자일 때는 다른 잡지에 비해 『어린이』는 자기 글을 잘 실어 주지 않는다고 독자담화실에 불평을 하기도 하셨는데요, 나중에 잡지 편집장이 되고 난 뒤에는 반대로 독자들의 독촉에 쫓기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셨어요.
▲ 『어린이』 제3권 제3호(1925년), 『어린이』 첫 번째 독자사진첩
*윤석중 선생님의 어릴 적(15세) 사진(오른쪽)
개벽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곱슬머리 차상찬 선생님
차상찬 선생님은 개벽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어른으로, 조선 13도 골골촌촌 안 가본 곳이 없기로 유명하세요. 작은 키에 얼굴은 검붉고 머리는 곱슬곱슬하시고요. 평소에는 점잖으나 놀 때는 우스운 소리를 잘하세요. 차(茶)를 좋아하시고, 말을 잘하셔서 농담이나 억설로라도 져 본 적이 없다고 해요. 글씨체는 엉킨 실 모양처럼 어수선하고 산란하고요,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수록 머리가 점점 빠지고 계세요.
▲ 『어린이』 제12권 제1호, 「우리 『어린이』 잡지에 글 써주시는 선생님들」
*차상찬 선생님 사진(오른쪽 상단 첫 번째)
이번에 소개한 분들 외에도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요. 잡지 『어린이』와 관련된 재미있고 다양한 이야기는 국립한글박물관 3층에서 전시하고 있는 기획특별전 <어린이 나라> 전시장에 직접 오셔서 확인해 보세요.
작성자: 김민지(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