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한글박물관 한박웃음

120호 20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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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국립한글박물관 <화요 한글문화 강좌> 제4회차 강연,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김태호 교수의 ‘한글과 근대 과학 기술의 만남’ 영상 장면이다. 김태호 교수가 의자에 앉아 이야기하고 있다.

한박 튜브 화요 한글문화 강좌 4회차 갈무리 한글과 근대 과학
기술의 만남

국립한글박물관 유튜브에는 기획전시, 화요 한글문화 강좌, 어린이 학습 영상 등 다양한 동영상들이
매달 새롭게 게재됩니다. ‘한박튜브’ 코너에서는 국립한글박물관의 주요 영상들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8월호에서는 2023년 국립한글박물관 <화요 한글문화 강좌> 제4회차 강연,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김태호 교수님의 “한글과 근대 과학 기술의 만남” 영상을 정리해
소개합니다.


#01

국립한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송기주 4벌식 한글 타자기 사진이다. 검은색 타자기가 검은색 가방 안에 들어 있다.

이번 강연은 ‘송기주 4벌식 한글 타자기’를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조금은 생소할 수 있는 이 타자기는 한글 기계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유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역사상 3번째, 실물이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한글 타자기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계에 한글을 입력하는 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한글 기계화의 과정은 상당히 험난했습니다. 송기주 타자기는 그 험난한 길을 개척해 나간 하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발명된 송기주 타자기가 들려주는 한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시길 바랍니다.

#02

김태호 교수가 정면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왼쪽엔 ‘타자기를 제작할 때 ㄱ을 하나만 만들어도 되는가?’라고 적혀있다.

과거 기계식 타자기 시대에는 ‘기계에 한글을 접목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과제 중 하나였습니다. 자음자와 모음자의 위치에 따라 그 크기와 모양이 미묘하게 바뀌다 보니 기술적으로 모아쓰기를 구현하기 어려웠던 데다, 한글 타자기 발명 초창기에 한글은 세로쓰기 방식으로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가로쓰기 용도로 만들어진 영문 타자기를 개조해서 세로로 쓴 문서를 제작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에 외솔 최현배 선생은 ‘한자도 쓰지 말고 한글만 쓰되, 가로로 쓰며, 풀어쓰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03

김태호 교수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왼쪽 아래엔 “글자 모양이 예뻐 보이지 않아!”라고 적혀있다.

다행히 세로쓰기와 가로쓰기에 대한 문제는 시간이 흘러 해결되어,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는 가로쓰기로 정착됐습니다. 하지만 자음자와 모음자의 형태가 바뀌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결국 24개 이상의 글쇠를 제작하여 최대 ‘5벌식 타자기’가 시판되기도 했습니다. 초성이 2벌, 중성(모음) 2벌, 받침 1벌로 만들어 글자의 모양을 살리도록 한 것입니다.

#04

김태호 교수가 의자에 앉아 양손을 가운데로 모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왼쪽엔 일문 타자기, 한자 타자기의 흑백 사진이 있으며, 그 밑엔 ‘커다란 활판에 활자를 늘어놓고 뽑아서 종이에 찍는 방식’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이나 문서로 찍어낼 때 여전히 글자가 고르지 않다는 아쉬움은 남아있었습니다. 이때 커다란 활판에 활자를 늘어놓고 뽑아서 종이에 찍는 방식인 일문 타자기와 한자 타자기를 썼다면, 마치 책과 같은 반듯한 문서를 인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글 타자기 발명가들은 이 방법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자음자와 모음자를 조합해 글씨를 쓰는 우리 한글의 장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05

김태호 교수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왼쪽엔 이원익 타자기의 광고 사진이 나와 있다.

한글 타자기 발명가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노력을 통해 다양한 발명품을 내놓았습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한글 타자기인 ‘이원익 타자기(5벌식 세로쓰기)’, 공안과의 공병우 의사가 제작한 ‘공병우 타자기(3벌씩 가로쓰기)’도 그 발명품 중 하나입니다. 특히 공병우 타자기는 60년대에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며, 한글 타자기로는 최초로 큰 수익을 내기도 했습니다.

#06

김태호 교수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왼쪽엔 송기주의 증명사진이 나와 있으며, 아래엔 ‘1900년 평안남도 강서 출생’이라고 적혀있다.

다시 오늘 강연의 주인공 ‘송기주 타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송기주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는 1900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1924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 시카고의 지도 제작사 랜드 맥날리에 취직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타자기를 사용하며 규격화된 문서 생산과 복제, 보관의 효율성 향상을 경험한 송기주는 ‘한글 타자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구 과정을 거쳐 1929년 최초의 송기주 타자기를 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07

송기주 4벌식 한글 타자기 사진이다. 검은색 타자기가 검은색 가방 안에 들어 있다.

오늘 소개할 타자기는 1934년에 제작된 4벌식 세로쓰기 타자기입니다. 이 타자기는 국내 신문사에서 많이 보도되었고 동아일보사는 타자기 홍보를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기사를 보면 국내 첫 시판 당시 송기주 타자기는 휴대용이 239원, 사무용이 550원이었습니다. 1930년대 당시 조선인 공무원의 월급이 60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6개월 치 월급을 모아야만 휴대용 송기주 타자기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높았습니다. 지금 물가로 치면 대략 자동차 한 대 가격에 버금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높은 가격과 일제 강점기 일본어 사용의 영향으로 한글 타자기는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08

송기주 타자기로 쓴 글자가 적힌 종이 사진이다. 사진 아래엔 ‘타자를 칠 때 왼쪽으로 90도 돌아가 있는 글자’라고 적혀있다.

송기주 타자기는 세로쓰기로 작성해야 했기에 타자를 칠 때는 왼쪽으로 90도 돌아간 상태로, 글자를 입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모아쓰기를 해야 했기에 종이를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플래튼’과의 연결을 끊었습니다. 받침이 없는 글자는 스페이스 바를 한 번 누르고, 받침이 있으면 스페이스 바를 누른 뒤 받침을 쓰고 다시 스페이스 바를 누르는 복잡한 방식으로 작성해야 했습니다. 송기주 타자기는 가지런한 문서를 제작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그가 한국 전쟁 시기 납북되어 ‘송기주 타자기’는 맥이 끊기고 맙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2014년 개관 때 이 ‘송기주 타자기’를 기증받아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에 방문해 실물을 확인하며 한글 기계화의 길었던 여정에 대해 사유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추천합니다.

[화요 한글문화 강좌]
한글과 근대 과학 기술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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