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방학이다!’
길고도 짧은 겨울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여러분의 방학은 어땠나요?
방학을 앞두고는 동그라미에 촘촘히 줄을 그으며 야심 찬 생활 계획표를 만들었겠지요.
그러다 어느새 개학 며칠 전이 되면 깜짝 놀라서, 기억을 끄집어가며 밀린 일기를 쓰고,
덮어 두었던 방학 숙제를 몰아서 하며 정신없이 새 학기 준비를 하지는 않았나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겨울방학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1927년, 보통학교 3학년에 다니던 권지갑 학생의 겨울방학 생활로 들어가 봅시다.
"매일 정해진 만큼 공부하세요. 공부가 끝나면, 밖에 나가서 기운차게 노는 것입니다."
▲ 보통학교 3학년용 동휴학습장(1927년)
▲ 보통학교 5학년용 하휴학습장(1929년)
보통학교가 운영되던 일제강점기,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이 되면 어린이들은 학교에 돈을 내고 ‘동휴학습장’과 ‘하휴학습장’을 받았습니다. 사진은 1927년에 발간된 보통학교 3학년용 동휴학습장과 1929년에 발간된 보통학교 5학년용 하휴학습장입니다. 모두 뒤표지에 ‘권지갑(權智甲)’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학생이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방학 학습장은 방학 동안에 아동이 학기 중 배운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또 방학 동안에도 꾸준히 숙제를 하며 긍정적인 습관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과제는 독본을 복습하고 문제 풀기, 일기 쓰기, 빈칸 채워 문장 완성하기, 산수 문제 풀기, 그림 그리기, 간단한 장난감 만들기 등 다양했습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국어가 일본어였고, 조선어는 일본어보다 훨씬 적은 시수로 교육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습장 역시 대체로 일본어로 쓰여 있지만, 중간중간 조선어로 적힌 읽을거리와 조선어 연습 과제도 보입니다.
1927년 겨울, 권지갑 학생은 매일매일 어떤 과제를 했을까요?
총 36쪽으로 되어 있는 겨울방학 학습장을, 권지갑 학생은 12일의 겨울방학 동안 매일 3쪽씩 풀었습니다. 학교마다, 지역마다 방학의 길이가 조금씩 달랐으므로 날마다 풀 학습장의 양을 미리 정하고 매일 계획한 만큼 공부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였습니다.
학습장의 모든 면 위쪽에는 그날의 날짜와 요일, 날씨를 적게 되어 있었습니다. 날마다 날씨를 적어야 하니 숙제를 미뤄서 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웠겠지요.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일기장에 그날의 날씨를 꼭 적어야 했던 것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1927년 12월 26일 월요일은 날씨가 맑았습니다. 이날은 단어를 넣어 한두 마디의 짧은 글을 짓는 과제를 했습니다. 보통학교 3학년인데도 권지갑 학생의 글씨가 퍽 단정하지요? 권지갑 학생은 ‘아즉’, ‘세상(世上)’, ‘점점(漸漸)’, ‘저절로’와 같은 단어로 짧은 작문을 했습니다. 조선어 과제 왼편에는 '세상에서 제일 긴 것이 무엇이냐?' 하는 수수께끼와 답이 적혀 있습니다. 방학 학습장에는 숙제하는 아동의 지루함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도록, 군데군데 속담이나 수수께끼, 만화나 유머 등이 실려 있기도 했습니다.
다음 말을 너어서 한두 마듸 은 글을 지으시오.
世上(세상)
공부를 잘하면 世上(세상)에 알니오
저절로
二學期(이학기) 放學(방학)이 돌아와서 저절로 긔운이 나오
12월 31일 토요일에는 재미있는 만화를 읽었습니다. 책을 가져다주는 우편배달부 아저씨의 고마움에 보답하려는 두 아이의 따듯한 마음을 배우고, 우체통에서 쏟아져 나온 사과들에 깜짝 놀란 배달부 아저씨의 모습에 웃음 짓기도 하였습니다.
⚀ 자- 아기. 小包(소포) 바드시오
⚁ 이런 조흔 을 갓다주엇네. 무슨 갑슬 드려야 하겟지
⚂ 만이 너어 드립시다
⚃ 포스토를 연 달부는 놀나서 털석 주저안젓습니다
"오늘은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동무와 얼음지치기를 하고서
학습장을 풀었습니다."
여러 가지 숙제 중 거의 매일매일 해야 하는 숙제가 있었으니, 바로 일기 쓰기였습니다. 권지갑 학생은 대부분 일본어로 일기를 썼는데요, 1월 5일 목요일에는 특별하고 재미있는 그림일기 과제를 받았습니다.
이날의 과제는 사흘 전에 읽었던 그림일기의 예를 보고, 글의 중간중간에 단어를 그림으로 바꾸어 일기를 쓰는 과제였습니다. 예시로 준 그림일기에서는 이웃 동무와 만든 눈사람은 온전한 모습으로 그리고, 밖에서 놀고 돌아와 저녁 때 본 눈사람은 눈코입이 녹은 모양으로 그린 세밀함이 돋보입니다.
권지갑 학생은 예시의 그림을 따라 그려도 보고, 자기만의 표현도 넣어 가며 열심히 그림일기를 썼습니다. 새해를 맞은 1월 5일, 권지갑 학생은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체조를 한 뒤, 밥을 먹고 이웃 동무와 한낮이 될 때까지 얼음지치기를 했다고 하네요. 오후에는 새총으로 새도 잡고, 하늘 위에 연도 날렸습니다. 어스름께까지 땀이 나도록 뛰어놀았을 신나는 하루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동휴학습장 첫 장의 머리말과 마지막 장의 편집 후기에는, 방학 과제를 통해 아동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주고, 사물과 사람을 보는 눈,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는 마음, 바르고 건강한 마음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가 밝혀져 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초등학교 방학 숙제의 모습은 조금씩 변해 갔지만, 매일 조금씩 노력하는 자세, 고민하여 깨닫고 성취하는 기쁨을 가르쳐 주려는 선생님의 마음만큼은 항상 변함없었을 것 같습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좋은 일을 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분명히 좋은 사람이 됩니다."
(동휴학습장 머리말 중)
정은진(연구교육과 학예연구사)